[INTERVIEW] 이희준, 그를 관찰한 어느 진실한 기록
[INTERVIEW] 이희준, 그를 관찰한 어느 진실한 기록
작품 속 캐릭터와 배우를 일체 시키는 것은 굉장히 큰 오류인데도, 우리는 작품 속에서 만들어진 배우의 말투, 표정, 행위들이 실제 그 배우의 것이라는 확신을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된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 배우가 캐릭터를 상당히 훌륭하게 연주해냈다는 평가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실은 배우가 소비되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배우 이희준을 만나러 가는 길, KBS2 드라마 <직장의 신>의 무정한 팀장을 만나러 가는 것 마냥 설레었던 것도 바로 이 당연한 오류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그는 과연 마냥 사람 좋기만 했던 무 팀장에 가까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NO. 어렵사리(?) 돌려 물은 기자의 질문에 돌직구를 날리는 거침없는 면모와 이내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분위기를 역전시키는 천진난만함, 그리고 지금이 배우 인생에 있어 또 하나의 큰 갈림길이 되는 것 같다고 솔직히 말하면서도 깊은 속마음을 꺼내놓는 것에는 주저하는 예민함, 하지만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고민들로 가득한 혼돈들이 브라운관 밖의 이희준을 관찰한 진실한 느낌이다.

대리만족을 주는 판타지로 존재한 미스김과는 다른 선상에서, 있을 법하지만 사실은 찾기 힘들어 또 하나의 판타지가 돼버렸던 무정한 팀장의 무모한 다정함은 비록 찾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무정한을 보낸 자리에 이희준이라는 더욱 근사한 배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Q. 이희준 씨를 너무나 만나보고 싶었다. 아마도 무 팀장 캐릭터가 ‘힐링’이 되는 캐릭터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희준 스스로는 무정한을 어떻게 보았나.
이희준 : 처음에는 모두가 걱정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PD님도, 작가님도, 오지호 형도 다들 내 캐릭터를 제일 걱정했다. 너무나 착하기만 하고 특별한 갈등도 만들지 않는 그런 인물이지 않나. 매력 없다 여길 만도 했다. 많은 분들이 무 팀장을 좋아해주셨지만, 실제로 직장 내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혹시 아나. 사람들이 대충 대한다더라. 상사로서 부하 직원에게 어떤 일을 지시해도 잘 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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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정한 팀장 같은 상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다들 말하지만, 실제 직장 내에서는 그저 사내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이희준 : 그렇다. 그래도 직장 내 상사들이 무정한을 보고 ‘아, 저렇게 해주는게 더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해 볼 틈을 마련해주었고,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또 ‘저런 상사가 사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측면은 분명 있었다.

Q. 그래도 무정한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매력 있는 사람이긴 했다.
이희준 : 그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고, 작가님 덕분이다. 작가님이 무정한의 이야기를 할 공간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지. 예컨대 정주리(정유미)의 가방을 챙겨주는 장면이나 미스김(김혜수)에게 고백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준다거나 하는 것들은 원작에는 다 없었던 것이다. 종방연 때 작가님 만나 악수 하면서 감사하다 인사드렸다. 정작 작가님이 내게 고맙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대본에 없는 것을 아무리 배우가 표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작가분이 그런 상황들을 다 만들어주셨기 때문이지.

Q. 비주얼적으로도 매력 있었다. 특히 백팩 패션. 그거 아무나 소화 못하는 패션이다.
이희준 : 그런 것도 결국은 작가님 덕분이다.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 아닌가. 일본 원작은 출근하는 장면 자체가 없다. 정시에 제자리에 앉는 것이 전부더라. 아무튼 덕분에 집에 백팩이 쌓여있다(웃음). 아는 친한 형들 줄 것이다.

Q. 그러고 보면, 주변에서 이희준 씨를 많이 아끼는 것 같다. 류승완 감독과도 특별한 추억이 있지 않나.
이희준 : 내가 생애 처음으로 ‘오디션 없이’(이희준은 이 대목을 힘주어 말했다), 내 이름이 적힌 시나리오를 받은 순간이 바로 영화 <부당거래> 때였다. 류승완 감독님께 전화가 왔고 만났는데, 남형사 역할을 해줄 수 있냐고 제안해주셨다.
[INTERVIEW] 이희준, 그를 관찰한 어느 진실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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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디서 이희준 씨를 발견했다고 하시던가.
이희준 :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더 나쁜 범죄>라는 영화에서 양아치처럼 거친 남자 역을 맡은 적이 있었고, 당시 심사위원이 바로 류승완 감독님이셨다. 저 배우 연락처 알아내라고 하셨다고 한다.

Q.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 같다. 배우로서 그렇게 배우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텐데.
이희준 : 물론이다. 수억의 돈보다 수많은 명성보다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인생에 남는 것은 사람이고 그들과의 교감인 것 같다. 류승완 감독님과 <부당거래> 한 편을 함께 했을 뿐인데 연극할 때마다 보러 오시고, 영화 <베를린> 때도 그랬고 새 영화 하실 때마다 전화를 꼭 주셔서 “이번에도 같이 하고 싶은데 이제 너무 유명해졌어”라고 말씀해주신다. 내가 <부당거래>에서 엄청난 연기를 한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챙겨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물론 감독님이 나만 그렇게 챙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같이 작업하면서 통했던 배우들은 계속 챙기시는 것 같다.

Q. <직장의 신>이 한참 방영 중이던 때 영화 <환상 속의 그대>를 보았다. 이희준의 작품 중 가장 좋은 이희준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어려운 감정일 텐데 스케치북에 쓱쓱 스케치하듯, 쉬우면서도 정확한 연기의 터치를 본 느낌이랄까. 그 순간, 혹시 저 배우 천재 아닐까라는 생각도 실은 했었다.
이희준 : 아니다. 나는 철저히 노력형이다. 그래서 한스럽다. 노력해야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배우인데 우리나라는 드라마나 영화나 급하게 찍는 경우가 많아 어렵다. 더 실력을 키우거나 혹은 더 힘을 키우게 되면 여유를 두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수 있겠지만, 지금은 더욱 노력해야하는 과정에 있다. 시간이 없다는 점에 한탄하기 이전에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노력해야만 한다.

Q. <직장의 신>을 끝내고 바로 또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이희준 : <결혼전야> 촬영 중이다. 드라마 때문에 내 촬영 분량을 6월로 미뤄놓았다. <직장의 신> 마지막 방송날 아침부터 촬영을 시작해야했다.

Q. 철저한 노력형이라는 말을 들어서인가, 이런 빠듯한 스케줄도 잘 참아내는 편인 것 같다.
이희준 : 아니다. 참을성이 없으니까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웃음).
[INTERVIEW] 이희준, 그를 관찰한 어느 진실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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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우가 된 과정이 흥미롭던데, 군 면제를 받게 되면서 연극을 하게 됐고 이후 한예종에 진학하게 됐지만 그 전에는 화학공학을 전공했으며 화장품 회사에 취직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만약 배우가 되지 않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게 됐다면 어땠을까.
이희준 : 완전 날라리였을 것이다. ‘어떻게 빨리 끝나고 놀까’ 궁리만 하는(웃음). 그런 면에서 배우가 된 것이 참 다행이다. 나의 장난기나 역마살, 자유분방한 성격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꽉 끼는 정장을 입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점심메뉴가 낙이 되는 그런 삶을 못 견뎠을 것 같다. 이번에 드라마하면서 직장인들을 더욱 존경하게 됐다. 그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그들 일상에 재미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웃음).

Q. 그래서 평범한 직장인들이 ‘사내연애’를 그렇게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웃음). <직장의 신>에서도 사내 연애 에피소드가 주는 잔잔한 재미들이 있었는데, 특히 무정한의 명장면은 미스김과 버스를 기다리며 ‘이거 뭐죠?’라고 말한 대목! 지금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신이었다.
이희준 : 정말인가? 내게는 그 신이 가장 어려운 신이기도 했다. 전체 중에 가장! 너무 생뚱맞다 생각도 들었고. 지문에는 ‘손 잡았는데 무정한은 온 몸에 전율을 느끼고’라고 적혀 있었다.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한 듯한 그런 표현이 요구되는 장면이었는데 내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30대 남자가 여자의 손 한 번 잡고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됐다. 전기가 찌릿한다는 느낌은 감각적으로는 알겠지만 그 상황에 놓고보면 실감을 못하겠더라. 그런데 감독님이 ‘그런 것 아닐까?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동성에게 이성의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의 당혹스러움 같은’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런 느낌으로 연기했다. 어쨌든 정말 쉬운 신은 아니었다.

Q. 사람들은 배우의 캐릭터가 배우의 본질일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지난 해 KBS2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이후 실제 이희준과 다른 이희준을 통해 이희준을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당혹스러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이희준 : 흠… 묻고자 하는 진짜 질문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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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실은 나 역시도 이희준을 무정한과 동일시 하다가, 어느 방송에서 ‘사람들이 날 너무 편안하게 보는데 내 진짜 성격은 예민해요’라고 말한 것을 보고는 기분이 묘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희준 : 흠. 사실은 나도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결국 지금은 하나의 과정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특정한 이미지를 고집해온 적은 없었다. 깡패나 양아치, 경찰이나 사이코패스, 혹은 멜로까지도 똑같은 마음으로 구분없이 해왔지만,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이미지만을 알고 또 좋아해주기도 한다. 그런 것을 알아버린 순간, 대중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방향으로 내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배우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성민 형이나 송강호 선배님, 강신일 선배님, 황정민 선배님 등 내게 배움을 주신 선배님들의 영향 탓인지, 대중의 기호에 맞춰 캐릭터를 선택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건 대중이 좋아할 것이라고 선택했지만 아닌 경우도 있을 테고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대중의 기호 역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언제나 변하는 것이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Q. 영화 작업까지 끝내놓고는 뭘 하고 있을 것 같나. 캐릭터에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을 보내야할 텐데 말이지.
이희준 : 캐릭터에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인데, 오래 걸려서는 작업하기 쉽지 않은 것이 실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작품을 끝내고는 산에 간다. 아무도 없는 순간이 필요할 때 말이다. 아직은 덜 알려진 얼굴인건지 등산복 입으면 다행히 알아보지 못하더라(웃음).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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