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수2002년 공연
김두수2002년 공연
(part1에서 이어짐) 김두수는 1991년 3집 ‘보헤미안’ 이후 11년 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한동안 ‘운둔의 가수’, ‘신비의 가수‘로 불렸다. 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왕산 산골짜기에서 사경을 넘나들게 한 경추결핵과 싸웠던 공백기는 그에겐 오히려 자기완성을 이룩한 절치부심의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창작한 곡들로 2002년 정규 4집 ‘자유혼’을 발표하며 돌아왔다. 오랜 은둔의 빗장을 열어 제치고 그가 들려준 노래들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음악적 실험과 아름다운 서정을 동시에 구현한 한 탐미적 멜로디였다.

김두수는 대구 신천동에서 은행원이었던 아버지 지재형과 중학교 교사로 봉직했던 어머니 김미성의 4남 1녀 중 막내로 1959년 8월 4일 태어났다. 네 살 때 잠시 마산에 살았지만 서울로 유학오기 전 까지 줄곧 대구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노래하는 것은 광대 짓’이라 생각했던 보수적인 분이었지만 노래를 즐겨 부르셨던 목소리가 예뻤던 어머니는 김두수 음악의 DNA였다. 김두수의 모교인 대구 삼덕초등학교는 한국 야구계의 스타 장효조, 양준혁, 이승엽을 배출한 야구명문이다.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도한 음악반에 참여, 동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이 그가 쓴 동요를 대필해 등사로 찍어 작곡집을 발표해 주었다. 음악공부에 재미를 느꼈던 그는 어떤 노래건 한번 들으면 계명을 쉽게 그릴 만큼 소질을 보였다. 이에 담임선생은 그의 부모를 찾아가 체계적인 음악 공부를 권유했지만 부친의 반대는 완강했다. 이때부터 부친과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해온 우등생이었던 그는 대구 오성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사춘기가 찾아왔다. 말수가 줄어들었고 보수적인 가정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가출을 생각할 만큼 증세는 심해졌지만 노래를 부를 때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보컬그룹을 결성해 여대생 누나에게 통기타를 한 달 동안 배웠다. 당시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 없었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는 기타 연습이 불가능했기에 그를 답답하게 했다. 전축이 있는 친구 집은 천국이었다. 매일같이 친구 집에 놀러가 존 덴버,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며 점점 음악에 빠져 들어갔다.

김두수 능인고 시절 공연모습
김두수 능인고 시절 공연모습
김두수 능인고 시절 공연모습

대구 능인고에 진학하자 혹독한 사춘기가 찾아왔다.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공부에도 관심을 잃게 했다. 학교 보다는 시냇가에 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이상한 아이로 변해갔다. 1978년 경북대에 진학했지만 틀에 박힌 대학생활이 견디기 힘들어 곧바로 자퇴를 해버렸다. 외진 시골길을 정처 없이 홀로 걷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도보여행 때 얻은 정서는 내 음악적 토양이자 밭입니다. 세상이 싫어지고 삶에 대한 허무감이 꽉 차 매일 술에 취해 살았죠. 1집엔 이때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1981년 고려대 농경제학과에 재입학했다. “대학은 꼭 졸업해 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거역하기 힘들었기 때문. 휴학을 밥 먹듯이 했던 그는 6년 만에 졸업을 했다.

휴학 중 삿갓을 쓰고 고무신을 신고 가야산의 한 암자를 찾았다. 50년 된 대나무 피리를 구해 밤낮으로 호숫가와 산중 바위에서 구성진 우리가락을 벗 삼아 세월을 낚았다. 어느 날, 예쁜 나비 한 마리가 피리 끝에 날아와 앉았다. 자연과 교감이 느껴지는 큰 감동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영감은 1집에 수록된 명곡 나비야로 탄생했다. 지서종을 기억하는 대학동창생은 없다. 무명 통기타 가수와 방랑으로 학창 세월을 보냈기 때문.

1982년부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명동의 PJ살롱, 쉘부르 등에서 무명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밤업소에서 근사한 예명을 요구해 왔다. 감명 깊게 읽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김두수가 생각나 장난 끼가 발동해 예명으로 정했다. 생활비의 95%가 술값이었을 만큼 삶의 허무감에 비틀거렸던 그에게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늘 그리운 대상이다. 집에서 15리 길이었던 어머니 묘소를 오가며 품었던 그리움은 조곡 ‘꽃묘(시오리길2)’로 생명력을 얻었다. 창작의 첫 발자국이었다. 1985년에 창작한 이 곡은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마음까지 돌려놓았다. “당시 아버님이 어머니 묘소에서 녹음기로 노래를 틀며 아들이 당신을 위해 만든 곡이라며 눈물을 흘렸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노래로 인해 세상과 멀어졌지만 노래 덕에 사람들과 소통한 뭉클한 순간이었죠.”

김두수 1986년 데뷔시절사진
김두수 1986년 데뷔시절사진
김두수 1986년 데뷔시절사진

대학 졸업 후 남미대륙 여행을 꿈꾸며 조양상선에 입사를 했지만 넥타이를 매자 숨이 막혀와 퇴사를 했다. 집안에 박혀 시집을 읽다보니 노래 가락들이 마구 떠올랐다. 즐겨 마시던 술도 멀리하고 창작의 물꼬를 텄다. 당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는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 노래로 만든 후 허락을 받으려 미당의 자택을 찾았다. 한국적 이미지가 진동하는 노래를 들은 서정주는 ‘좋군. 부르게’라며 흡족해 했다. 음반을 발표하고 싶어 킹 박을 찾아가 즉석 오디션을 받았다. 킹박은 시오리길의 네 소절만 듣고“그만 됐다. 판 내자”고 만족감을 표했다. 1986년 데뷔음반 녹음은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시위정국으로 뒤숭숭했던 80년대는 고려대 출신 가수의 비탄조 가사를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심의불가 판정을 받았다. 대박을 꿈꾸던 킹 박은 발 빠르게 사무실 미스 리의 제안대로 문제가 된 ‘철탑’을 ‘작은 새의 꿈’으로 제목과 가사를 일부 수정해 심의를 통과시켰다. 수록할 노래가 모자라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리메이크한 것까지는 참고 넘어갈 만 했는데 재킷 커버가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는 가수의 얼굴사진을 크게 배치한 촌스런 앨범 재킷이 유행하던 시절. 재킷 이미지로 내정되었던 윤해남 화백의 추상화를 앨범 뒷면으로 옮기고 김두수의 얼굴 사진을 슬그머니 재킷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넣어버렸던 것. 김두수는 데뷔음반을 받아들고 절망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곡이 아닌 미당 서정주의 시 귀촉도를 회사에서 주력 홍보 곡으로 삼자 시인에게 누가 될까 싶어 반항까지 했다. “아마도 유명 시인의 명성을 등에 업고 히트를 시키려했던 홍보 전략을 막았던 저를 제작자는 정신 이상자로 생각했을 겁니다. 전량 폐기하고 싶었던 데뷔음반이 60만원이 넘게 거래되고 있다니 황당할 뿐이네요” 음악외적인 벽에 막혀 고통을 안겨준 1집에서 가녀린 듯 떠는 김두수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묘한 신비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의 무차별 방 수색은 노래에 염증을 느끼게 했다. 김두수의 데뷔앨범은 콜렉터들의 수집표적이 되었지만 본인에게는 상처로 얼룩진 음반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앨범 재킷이 처음 의도했던 그림으로 복원된 박스음반이 금년 말 세상 빛을 다시 볼 예정이란 점이다.

김두수 2002년 한강 인물1
김두수 2002년 한강 인물1

한동안 음악활동을 중단한 그에게 1988년 동아기획에서 음반제작을 제안했다. 검열에 막혀 제목이 변경된 ‘작은 새의 꿈’을 원제목인 ‘철탑 위에 앉은 새’로 부활시키고 진흙을 박차고 솟아나는 새순의 이미지를 담은 윤해남 화백의 새로운 그림을 2집 재킷으로 삼으며 응어리 졌던 한을 풀었다. 기분 좋은 마음에 처음으로 방송 출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는 댄스가수 박남정. 한 라디오 공개방송에 그는 박남정의 다음 순서로 출연을 했다. 김두수는 그때를 떠올리며 웃음이 빵 터졌다. “인기 댄스가수의 춤과 노래에 열광하던 소녀 팬들이 제가 나와서 노래하자 완전 분위기가 다운되었습니다. 어디서 저렇게 이상한 가수가 나왔냐는 표정으로 어찌나 냉랭한 반응을 보이던지 당황스럽더군요.”

김두수의 음악은 70년대 포크의 질감을 기반으로 장르와 분석이 힘든 다양한 프로그레시브, 포크 록 어법을 넘나들고 있다. 순박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파열음을 내는 난해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흐느적거리듯 나른한 멜로디와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시적인 노랫말은 삶이 버거운 사람들에겐 노래 이상의 존재로 다가간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노래 분위기와 신념과 맞지 않은 곳은 앞으로도 거리를 둘 생각입니다.” 그래서인가 지난 2000년 미당 서정주의 장례식 때 초청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미당의 친일 행적에 대한 당시의 뜨거운 논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 하지만 그의 노래 ‘귀촉도’는 음반을 통해 미당의 장례식장에서 조곡으로 들려졌다.(part3으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김두수 프로필
1959년 8월 4일 대구광역시 출생 고려대 농경제학과 졸업
2002년 4집 자유혼 네티즌 선정 최고의 한국가요 앨범
2003년 서울YWCA 부활 청개구리공연 창단 멤버
2007년 4집 자유혼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2009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