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하정우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예술가 집안의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하정우는 모든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 심지어 즐기기까지 한다. 하정우가 지금 온리 원(Only one)인 이유. 붓 끝에 자유를 담고, 무대 위에 열정을 쏟고, 카메라 안에서 사색하는 전천후 배우 하정우의 ‘더 하정우 라이브!’가 궁금하다.


Q 민머리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다니는 게 더 좋아 보이네요. 뭔가를 감추려는 행동이 오히려 그걸 더 두드러지게 하곤 하잖아.
하정우:
맞아요. 숨기는 게 더 쑥스러워요. 사람들이 “모자 벗어 봐요” 이럴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머리는 익숙해요. 고등학교 때도 삭발하고 다녔거든요. 학교 규정이 있잖아요. 귀 밑 3센치. 그게 지루하더라고요. 차라리 삭발하고 다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잘랐죠.

Q. 반항의 일종이었나요?
하정우:
에이, 그 정도로 무슨. 그.냥.패.션.의.일.부.였.죠!(웃음)

Q. 하하한. 그나저나, 400만 돌파 축하드려요.(이 인터뷰는 8월 13일에 진행됐다. 그리고 ‘더 테러 라이브’는 8월 18일 500만을 돌파했다.)
하정우:
네. 어제 밤 11시에 400만이 넘었어요. 지금 추세라면 이번 주말에 500만이 될 것 같네요.

Q. 흥행 스코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데, 이번엔 물어봐도 될 것 같아요. 솔직히 몇 만 예상하셨어요? 이렇게 잘 될 줄 알았나요?
하정우:
아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안 될 것도 없지’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희망을 품고 사니까. 그런데 입 밖으로는 절대 내 생각을 얘기하지 않죠. 특히 스코어는요.

Q. 최근 몇 년 동안 선택하는 작품마다 실패가 없었어요.
하정우:
네. 손익분기점이 다 넘었죠.

Q. 실패 없이 가는 삶, 살짝 두렵진 않나요?
하정우:
두렵고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 역시 짊어지고 가야죠.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처음 작품 선택할 때의 기준을 지켜 나간다면,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Q. 그 기준이 뭐죠?
하정우:
재미죠, 재미. 영화적 재미. 영화를 찍는 목적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어떤 사람은 캐릭터를 통해 내 연기를 뽐내고 싶어서, 또 어떤 사람은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그냥 선택하는 경우가 있죠. 물론 저는 영화 선택에 있어 유리한 부분이 있어요. 좋은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오니까요. 그랬을 때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과연 이 영화에 매력이 있냐’를 1번으로 따져요.

Q. 재미보다는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선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하정우:
그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재미가 있어야 관객에게 사랑을 받는 거잖아요. 돈을 벌고 안 벌고 그 다음 문제죠.

Q. 가령 이윤기 감독님의 ‘멋진 하루’는 감독님 스타일이나, 시나리오 상으로 큰 흥행이 되리라는 예상이 드는 작품은 아니잖아요. 다른 관객층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하정우:
그땐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죠. 제 연기경험이 부족했고,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한정돼 있었고. ‘멋진 하루’를 선택한 건, 전도연이라는 배우와 함께 공연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컸어요. 물론 지금도 그런 게 있긴 하죠. ‘함께 작업하는 감독님과 배우들을 통해 내 자신을 연마할 수 있겠다’ 하는 걸 염두 하기도 해요. 하지만 주연배우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잖아요. 고려해야 하는 옵션들이 늘어난 거라고 생각해요.

Q. 연습할 때, 대본에 바를 정자(正)를 적는 걸로 알아요. 연습한 횟수를 기록하기 위해서요. ‘더 테러 라이브’는 단독 주연작인만큼 연습량도 많았을 텐데, 바를 정자를 몇 번 그렸나요?
하정우: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렸어요. 아예 태블릿 PC랑 휴대전화에 대사를 찍어서 어디서든 펴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녔어요. 잘 안 외워지는 대사들, 모놀로그 같은 긴 대사들은 특히나 더요.

Q. 특히나 안 외워졌던 부분이 어디였어요?
하정우:
흰색 아반떼 차량이 다리에 걸려서 떨어지는 걸 중계하는 대목이요. 그 장면이 영화 안에서는 즉흥적으로 생중계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 맛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대체적으로 대사들이 다 길어서 쉬지 않고 연습했던 것 같아요.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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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캐릭터가 사실감 있게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는 그 배우가 표현하는 디테일에 있다고 보는데, 제가 생각하는 당신 연기의 가장 큰 자산은 그런 디테일이 아닐까 싶어요. ‘하테일’이라고 해 두죠.(웃음) 당신 영화에서 그런 디테일이 특히 잘 산 게 ‘멋진 하루’인데, 이번 영화도 못지않더군요. 윤영화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계산을 하고 들어갔는지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하정우:
방송할 때와 방송하지 않을 때, 캐릭터 낙차의 폭이 크면 클수록 영화적으로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씬으로 얘기해 볼게요. 마포대교가 폭파되는 걸 본 윤영화가 정PD에게 “이거, 우리가 하자!” 한 다음에 화장실에 가서 차국장과 전화통화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 와이프 이지수랑 통화를 하잖아요. 그랬을 때 이 세 가지. 그러니까 정PD에게 얘기할 때와 차국장과 통화할 때, 김지수와 통화할 때 이 세 가지가 다르게 보여 지면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쭉 해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세히 보면 차국장이 라디오 부스에 들어와서 “정PD, 얘기 못 들었어? 이 프로그램 폐지됐어!” 할 때 컷이 저에게 와요. 그때 윤영화를 보면 차국장에게도 동요를 안 하고, 정PD에게도 동요하지 않아요. 그냥 혼자 딴 짓을 하고 있죠. 그 컷이 뉴스 시작하기 전, 윤영화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거기에서 정PD에게 변명 하거나, 혹은 차국장에게 동조를 하거나 했으면 캐릭터가 한쪽으로 쏠려 보였을 거예요. 그런데 그 컷에서는 도리어 내가 여백을 만들어놓고 딴 짓을 하면 관객들에겐 그 지점이 쉼표가 될 수가 있죠. 그것이 뉴스 시작하기 직전, 마지막 컷. 제가 특히나 신경 썼던 부분이에요.

Q. 이런 구체적인 생각은 시나리오를 받고 어느 단계에서 정립하세요?
하정우:
처음 공부할 때,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잡아요. 왜냐하면 촬영할 때 연기최고의 적은 욕심과 텐션이거요. 욕심이 크면 텐션이 생길 수밖에 없고, 텐션이 생기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후진 연기가 나와요. 촬영장에서는 내가 준비한 걸 릴렉스하게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대신 그렇게 편한 상태에서 연기를 하려면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연구하고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해요. 심지어 감독의 디렉션까지 미리 씬 바이 씬으로 예측해서, 나에게 무슨 디렉션을 줄 것인지, 초 목표가 무엇인지 다 체크를 해요. 그렇게 하면 촬영 때는 별로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미리 다 준비해 놓고 촬영에 들어가는 편이에요.

Q. 이게 일반적인 연기 톤은 아닐 텐데요.
하정우:
네. 그런데 저는 촬영할 땐 절대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령 야구선수들을 보세요. 야구선수들은 스프링캠프에서 시즌을 열심히 준비하지만 경기에서는 준비한 걸 보여 줄 뿐이에요. 돌발변수에 대한 상황대처는 하지만, 계획한대로 던지는 거죠. 저는 야구를 보면서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어요. 그래서 야구가 지닌 특성을 제가 일 하는 방식에 많이 써 먹죠.

Q. 촬영장에서 텐션을 안 느끼고 오히려 릴렉스하게 풀어내는 건, 사실 신인들은 하기 힘든 연기예요.
하정우:
아~ 그렇죠! 오만가지 생각이 드니까. 시행착오를 거쳐야 정립이 되는 게 있죠. 저 역시 처음에는 많은 혼란을 겪었고요. 그러면서 야금야금 쌓였던 거예요. 7-8개월 장기로 찍는 영화에서는 체력 안배를 어떻게 해야 하고, 단기로 찍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요. 집중과 안배가 참 많이 중요해요.

Q. 집중과 안배라. 1년 가까이 촬영한 ‘황해’때 특히나 힘들었겠네요.
하정우:
그때 많은 걸 배웠어요. ‘더 테러 라이브’ 촬영장은 파주였어요. 그 정도 거리면 집에서 하루에 3-4번은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요. 자유로 타고 쭉 가면 30-40분밖에 안 걸리니까. 그런데 그땐 아예 방을 구해서 파주 세트에서 살았어요. 촬영 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짧은 시간 고도의 집중을 하 거죠. 반면 지금 촬영 중인 ‘군도’는 집에서 다녀요. 오늘도 문경에서 올라왔는데, 이 정도 거리면 그냥 출퇴근을 해요. 장기 레이스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환기를 할 필요가 있거든요.

Q. 중앙대 연극과 출신이죠? 지금의 연기패턴은 당시 학교에서 터득한 것들이 가장 크게 작용할 텐데요, 실패를 통해 연기에 대한 스타일을 수립한 건가요, 아니면 성공을 통해 그 스타일을 더 견고하게 해 나간 편인가요?
하정우:
전자에요. 연극무대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공연 중에 극장 불이 다 꺼지는 정전 사고도 있었죠.

Q. 그런 경우 배우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일 거예요. 첫째, 계속 연기를 한다. 둘째, 관객과 함께 당황한다.(웃음) 어느 쪽이었나요?
하정우: 웅성거리는 관객들 속에 1분 정도 있었나? 머뭇거리는데 핀 조명이 하나, 저를 ? 비추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연기를 했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웃음) 그런 사고도 있었고, 칼싸움을 계속 해야 하는데, 상대 칼이 부러져서 당황한 적도 있었고, 내 연기에 취해서 혼자 잘 하면 장땡이지 하고 연습하다가 정작 공연기간엔 한 번도 베스트 연기가 안 나왔던 경우도 있었고.

Q. 자괴감이 들었겠네요.
하정우:
그때는 대인기피증까지 걸렸었어요. 나중엔 모든 사람들이 싫더라고요. 마지막 공연 땐 연출에게 “당신하고는 평생 안 보겠다”는 악의적이고 유치한 편지를 써서 가슴에 안고 공연을 했어요. 그 공연도 완전히 망했죠.
하정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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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인이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하정우:
이기심이었던 것 같아요. ‘카르멘’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제가 그 작품을 통해 연기 앙상블을 배웠어요. 이전까지는 주인공 혼자 잘 하면 되지, 착각 했던 거예요. 눈에 보여 지는 것만 생각했고, 즉흥연기에만 기댔고요. 어렸던 거죠. 그게 2001년도에요. 그 작품을 끝내놓고 방황하다가 코믹 캐릭터들을 주로 맡았어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했는데, 그때 계산을 다시 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코미디 연기만 하니까, 선배들이 항상 반쪽짜리 배우라고 놀렸어요. 정극연기에 대한 목마름이 컸죠. 그래서 선택한 게, ‘오델로’에요. ‘발성부터 다시 해보자, 내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캐릭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런 생각으로 계산을 해서 연극을 올렸죠. 그렇게 계획한대로 하니까 오차가 없는 거예요.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목이 잠기는 날에도 평균 이상으로 공연을 마치게 되더라고요. 그걸 경험하면서 ‘아, 연기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죠.

Q. 이번 영화는 단독 씬이 많았기 때문에 당신이 예상했던 대로 진행하기에 특히나 수월했겠네요.
하정우:
맞아요. 거의 계산한 대로 됐어요.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희극 릴리프예요. 드라마가 정점을 찍거나 비극으로 치닫기 전에 릴리프를 주는 포인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때 체득했어요. 그걸 영화 연기에 접목시켰을 때, 많이 맞아 떨어진 부분이 있고요. 그걸 보고 관객들이 저에게 입체적으로 보인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더 테러 라이브’는 그것이 정석으로 적용된 경우죠.

Q. 그렇다면, 궁금한 게 전체적인 톤이 어두웠던 ‘황해’에서 구남(하정우)이 릴리프 되는 순간을 어디로 뒀나요?
하정우:
구남이 서울에 와서 여관방에 가잖아요. 그때 옆방에서 남녀가 관계 갖는 소리를 듣고 발로 차는 거, 계단에서 손가락을 하나 둘 셋 넷 세는 거, 이런 게 다 릴리프 씬들이에요. 저의 실수가 있다면, 그러한 요소들을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다는 거예요. 나홍진 감독도 알아요. 그래서 그렇게 많은 먹는 장면들을 넣은 거였고요.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죠.

Q. 테러범과 몸이 아닌 머리로 맞서는 윤영화에게 필요한 건 대화의 기술이 아닐까 싶어요. 당신은 어때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하정우라는 배우는 대화의 기술이 굉장히 탁월한 사람이라는데.
하정우:
하하하. 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 한 게 도움이 됐나? 이렇게 인터뷰를 많이 한 게 도움이 되기도 한 것 같고. 아! 제가 또 연기 선생님을 했거든요. 가르치면서 화술이 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결국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여러 경험을 통해 쌓인 거죠. 매뉴얼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요. 하하하. 그런데 말의 기술에서 중요한 건,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 하느냐가 아닌가 싶어요. 단순히 기술만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엔, 상대방이 다 느끼죠. 대부분의 사람이 철학보다는 기술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고요.

Q. 아나운서 중에서도 허언(虛言)을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하정우:
네. 그래서 대화의 기술에서 필요한 건 내가 진실로 그렇게 느꼈느냐가 아닌가 싶어요. 그것이 진실과 통하는 것일 테고요.

Q. 지난 번 ‘베를린’ 인터뷰로 만났을 때, 조만간 뉴욕에 전시회를 하러 간다고 했어요. ‘베를린’ 촬영하면서 그린 그림의 화풍이 이전과 다른데, 그걸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라 기대가 크다고도 했고요. 반응이 어땠어요?
하정우:
큰 반응을~ 하하하하. 일단, 그림이 다 완판 됐어요.

Q. 오, 몇 점이었죠?
하정우:
16점이요. 지금 뉴욕의 많은 갤러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데, 내년 초에 뉴욕에서 다시 전시를 할까 고민중이예요. ‘군도’가 끝나면 개인전을 할까도 생각하고 있고요.

Q. 요즘에도, 그림 그리고 있나요?
하정우:
최근엔 못 그리고 있어요. 두 달 전에 한 작품 그렸나?

Q. 텀이 꽤 기네요?
하정우:
지금 집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거든요. 사촌누나 집에 6주째 살고 있다 보니. 하하하.

Q. 연기할 때 억눌린 것들을 그림으로 푼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두 달 동안은 어떤 걸로 푼 건가요? (웃음)
하정우:
두 달간 일들이 많았어요. ‘더 테러 라이브’ 개봉도 있고, ‘군도’도 있고. 그리고 또 요즘은 억눌린 게 크게 없는 것 같아요.(웃음)

Q. 그건 반가운 일이네요. 심리적 불안을 선을 해체하는 그림 작업을 통해 풀고 계셨었는데.
하정우:
아, 그렇지 않아도 인터뷰 하면서 낙서는 했어요. 보여드릴까요? (보도 자료를 펼치자, 물고기 그림이 나타난다.) 이거, 드릴게요. 또, 이렇게 제가 사인을 해야~(사인까지 척척)

인터뷰를 하며 하정우가 끼적인 물고기 그림. 그림으로 유추할 수 있는 하정우의 심리상태는?
인터뷰를 하며 하정우가 끼적인 물고기 그림. 그림으로 유추할 수 있는 하정우의 심리상태는?
인터뷰를 하며 하정우가 끼적인 물고기 그림. 그림으로 유추할 수 있는 하정우의 심리상태는?

Q. 와, 고맙습니다.
하정우:
마티즈도 그렇고 피카소도 그렇고 후기작들을 보면 굉장히 단순해요. 그런데 그냥 단순한 게 아니에요. 여러 가지 형태로 진화하고 변화하다가 다시 그 선과 점으로 돌아간 거잖아요. 그 사람이 평생 그려 온 작업들이 그 선 하나에 응축됐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거죠. 결국 커피빈의 모토와 같은 거예요. ‘단순 한 것이 최고(Simply the Best)’라는.(커피빈 비유에 혼자 웃음 터진 기자.)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연기를 하면서 뭔가를 화려하게 뽐내는 게 점점 창피해지고 있어요. 도리어 내 주변을 둘러 싼 것들, 이를테면 음악이 관객들에게 느껴졌으면 좋겠고, 미술이 느껴졌으면 좋겠고, 연출이 보여 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커요. 종합선물세트처럼 모든 게 함께 느껴져야지, 배우가 앞에 나서서 ‘나 이 정도야!’ 하는 건 점점 저에게는 오그라드는 행동으로 다가오는 중이에요.

Q.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가 개봉도 하기 전에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 매혈기’가 결정됐어요. 감독에 대한 꿈을 오랜 시간 품고 계셨는데, 행보가 빠르네요. 어떻게 연출을 시작하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어느 시기에 시작하느냐가 아닌가 싶은데,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나요?
하정우:
그건 몇 십 년이 지나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아요. 사람마다 각자의 때가 있겠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40대 초중반에 연출을 시작했어요. 스티븐 스필버그는 배우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30대 초반에 ‘죠스’를 하고, 제 나이 때 ‘이티’를 찍었고요. 그런 걸 보면 제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쎄요. 나에게 맞는 시기라. 그게 그런 것 같아요. 이삿날 고르듯 어떤 시기를 노린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찼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닌가. 어떤 준비가 돼서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기 때문에 시도 하는 거라는 거죠. 그런데 역시 순탄하지 않더라고요. ‘롤러코스터’를 하면서 ‘아, 신인감독들의 고충이 이런 거구나’ 뼈저리게 경험했죠.

Q. 예를 들면요?
하정우:
투자사 입장에서 배우 하정우는 신뢰를 느낄만한 사람이지만 감독 하정우는 아니잖아요. 의문인 거죠. 배우 출신이라는 게 오히려 선입견을 줄 수도 있고요. 저 개인만 해도 그래요. 배우로 영화를 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거예요.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순간도 맛봤어요. 가령 배우로서 작품을 볼 땐 “이 부분에서는 윤영화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네요.” 혹은 “스토리가 여기에서는 힘이 빠지네요” 이런 걸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데, 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찍을 때는 매몰된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걸 제대로 못 보는 거예요. 그걸 경험하면서 ‘감독이라는 사람들, 특히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구나.’를 느꼈죠.

Q. 매몰된 순간, 어땠어요?
하정우:
끔찍했어요! 정말로 끔찍했어요!

Q. 잘 벗어난 것 같나요?
하정우:
하하. 그건, 결과물을 보고 판단해 주세요. 어땠는지 꼭 얘기도 해 주시고요.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제공. 판타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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