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리차드3세’에서 주인공 리차드3세를 맡은 배우 황정민 / 사진제공=샘컴퍼니
연극 ‘리차드3세’에서 주인공 리차드3세를 맡은 배우 황정민 / 사진제공=샘컴퍼니
배우 황정민은 10년 만에 연극 ‘리차드3세'(연출 서재형)를 선택하면서 “관객들이 ‘이제 영화 그만하고 연극만 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잘하고 싶다”고 했다. ‘리차드3세’가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렸고, 아마도 황정민의 바람은 이뤄질 듯하다. 극 중 리차드3세를 연기하는 그의 모든 몸짓과 눈빛은 공연 시간 100분 내내 빛났다.

‘리차드3세’는 셰익스피어가 영국 장미전쟁기의 실존 인물인 리차드3세에게 영감을 받아 쓴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명석한 두뇌와 언변을 가진 왕자로 태어났지만 ‘곱사등’이라는 신체 결함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며 자란 리차드 글로스터의 삶을 다룬다. 그가 권력욕을 가지면서 벌어지는 참혹한 과정을 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 황정민과 정웅인, 김여진 등의 출연으로 개막 전부터 주목받았다. 황정민의 연극 출연은 2008년 ‘웃음의 대학’이후 10년 만이다.

서재형 연출가와 한아름 작가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일부 대사는 현대어로 순화해 관객과의 거리를 좁혔다. 리차드가 “마치 고구마 100개 먹은 것 같이 답답하구나”라며 상황을 묘사하는 식이다.

연극 ‘리차드3세’에 출연하는 배우 김여진(왼쪽), 황정민 / 사진제공=샘컴퍼니
연극 ‘리차드3세’에 출연하는 배우 김여진(왼쪽), 황정민 / 사진제공=샘컴퍼니
연극 ‘리차드3세’에 출연하는 배우 정웅인(가운데), 황정민(오른쪽) / 사진제공=샘컴퍼니
연극 ‘리차드3세’에 출연하는 배우 정웅인(가운데), 황정민(오른쪽) / 사진제공=샘컴퍼니
내용의 흐름에 군더더기는 없다. 리차드3세가 원하는 건 오직 왕이 되는 것뿐이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건 여자든 아이든 모조리 없애고 짓밟으며 목표를 향해 걸어갔다. 오직 ‘왕관’만이 그에게 고귀하고 성스러웠다. 욕망에 가득 찬 한 남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난폭해지는 과정인데, 현대라고 없는 일은 아니어서 몰입도 잘 된다.

무대 디자인은 단조롭다. 침대와 긴 탁자를 이용하는 것 외에 큰 변화는 없다. 대신 평면의 사각 천장에 다채로운 영상을 틀었다. 약 10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장면은 영상을 활용했다. 이는 리차드3세의 욕망이 극에 달했을 때 더 돋보였다.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데는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구부정한 허리와 비틀어진 손, 다리를 특수한 장치 없이 스스로 표현한 황정민은 리차드3세 그 자체로 보였다. 그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연극으로 만들어졌을 때, 시(詩)와 같은 문체들이 배우의 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어설프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 더러 있었다. ‘리차드3세’는 달랐다. 극을 이끄는 황정민은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다른 배우들과 대사를 주고받으며 호흡하는 것 외에도 객석을 향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감정을 털어놓는 방백 장면도 수 차례다. 황정민이 뱉어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단 하나도 뭉개지지 않고 또렷하게 잘 들린다. 100분간 그를 따라가는 데 전혀 피곤함이 없는 이유다.

잠시 연극 무대를 떠난 2010년부터 황정민은 ‘부당거래’를 시작으로 줄곧 영화에만 출연했다. ‘댄싱퀸’ ‘신세계’ ‘국제시장’ ‘베테랑’ ‘히말라야’ ‘검사외전’ ‘곡성’ ‘아수라’ ‘군함도’까지 제목만 들어도 알 만한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건 더 뚜렷해졌지만, 연기의 색깔에 새로움이 없다는 평가도 일부 나왔다. 스스로는 걸음걸이와 어투, 억양을 다르게 하고 눈썹과 입꼬리를 올리는 등 섬세한 변화를 줬겠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겐 욕 잘하는 검사나 경찰, 아니면 인간미 넘치는 서민이었다. ‘리차드3세’는 황정민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그런 갈증을 달래는 작품이다.

황정민은 100분 동안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방대한 대사를 한 번도 ‘씹지’ 않고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란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큰 박수가 터져 나오는 커튼콜에서, 악인을 연기하며 연습실과 무대 위에서 외로웠을 그의 옅은 미소를 보니 뭉클했다.

오는 3월 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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