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스틸
영화 ‘설국열차’ 스틸
영화 ‘설국열차’ 스틸

‘아이 엠 러브’의 우아한 ‘일탈녀’ 틸다가 ‘설국열차’에서 성가시고 괴팍한 메이슨 총리로 거듭난다. 그녀의 연기 변신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탑승권을 살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 ‘영 아담’ ‘나니아 연대기’ 스틸
영화 ‘영 아담’ ‘나니아 연대기’ 스틸
영화 ‘영 아담’ ‘나니아 연대기’ 스틸

큰 키와 창백한 피부, 유별난 붉은 머리가 그녀에게는 진정 축복이었다. 네덜란드 패션 디자이너 빅터 앤 롤프의 뮤즈인 틸다 스윈튼은 스코틀랜드의 피가 흐른다.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 무대에서 연기할 때부터 일반화된 성 역할을 파괴(젠더 벤딩)하는 모습을 자주 선보였다. 개인적으로 스크린에서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악명 높은 게이 감독 데렉 저먼의 영화 속이었다. ‘카라바지오’(1986)부터 ‘비트겐슈타인’(1993)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저먼의 유작 ‘블루’에 목소리 출연을 할 정도로, 그녀는 데렉이 손수 빚어낸 아이콘이었다. ‘대영제국의 몰락’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절규하는 그녀를 본다면 결코 그 모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물론 그녀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것은 버니지아 울프의 소설을 샐리 포터가 영화화한 ‘올란도’였다. 올란도처럼 남녀를 오가는 캐릭터는 보이시한 면을 갖고 있는 그녀가 소화하기에는 제격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지만, ‘비치’, ‘바닐라 스카이’ 등의 작은 역할보다는 ‘영 아담’(2003)의 바지선에서 이완 맥그리거와의 끈적거리는 정사가 더 인상적이었다. 물론 최고의 역할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서의 하얀 마녀였다. 뾰족한 얼음 왕관을 쓴 그녀는 하얀 드레스와 하얀 모피코트를 입고 자신의 위풍당당함을 마음껏 과시했다. 압도적인 그녀의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역시 ‘얼음 여왕’이라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영화 ‘리미츠 오브 컨트롤’ ‘아이 엠 러브’ 스틸
영화 ‘리미츠 오브 컨트롤’ ‘아이 엠 러브’ 스틸
영화 ‘리미츠 오브 컨트롤’ ‘아이 엠 러브’ 스틸

그녀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제대로 활용한 것은 짐 자무쉬의 ‘리미츠 오브 컨트롤’(2009)이었다. 백발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는 여신의 풍모를 발산했다. 블론드 역으로 등장한 그녀는 흑인 킬러 이삭 드 번콜에게 묘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아픔과 고통을 잘 표현했지만, 역시 틸다가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은, 뒤늦게 개봉해 화제를 모은 ‘아이 엠 러브’ 때문이었다. 밀라노 상류층 재벌의 아내 엠마로 등장한 그녀는 온화하고 자상한 엄마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들의 친구 요리사에게 빠져들어 불륜을 저지르는 일탈을 선보인다. 새우 요리를 먹고 짜릿한 쾌감을 얻은 그녀는 요리사에게 더 많은 것을 욕망한다. 어느덧 오십 살을 앞 둔 그녀였지만, 알몸의 정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는 해방감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을 표했지만, 사실 이야기는 새로울 게 전혀 없었다. 흔하디흔한 멜로드라마였다. 오래 전 데이빗 린의 ‘밀회’(1945)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았다. 아들이 사고로 죽은 후 극도의 비참함에 사로잡힌 그녀는 남편에게 “당신이 알던 난 이제 없다”라고 선언하며, 궁궐처럼 화려한 저택을 유유히 떠난다. 명품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츄리닝’을 선택했을 때 그녀가 어떤 삶을 살지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영화 ‘설국열차’ ‘케빈에 대하여’ 스틸
영화 ‘설국열차’ ‘케빈에 대하여’ 스틸
영화 ‘설국열차’ ‘케빈에 대하여’ 스틸

지금껏 틸다는 많은 변신을 시도했지만, 최고의 변신은 역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가 연기한 ‘꼬장녀’ 메이슨 총리는 압도적인 비주얼로 다가온다. 뿔테 안경과 앞으로 돌출된 입(틀니) 때문에 틸다를 못 알아볼 정도니까 말다했다. 여자기숙사의 성격 나쁜 사감 선생처럼 꼬리칸의 친구들을 닦달하며 괴롭힌다. 무척 재미난 것은 틸다가 봉 감독과 메이슨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녀는 인터넷으로 화상 통화를 하면서, 자신이 영국 요크셔 지역의 액센트를 쓰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이 캐릭터에 필이 꽂힌 그녀는 자신을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설정했다. 즉 그녀는 기차 안의 지배자 윌포드의 충실한 견공이자 네임드로퍼(저명인사의 이름을 친구처럼 팔고 다니는 사람)다. 봉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촬영 분량이 없을 때도 틸다는 송강호의 연기를 유심히 봤다고 한다. 심지어 송강호와 함께 투 샷으로 연기할 수 있는 분량을 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아쉽게도 영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진 않는다. 봉 감독은 “틸다와 송강호가 무인도에서 표류하면 재미겠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틸다의 열정을 높이 산다. 미국에서 연말에 개봉할 짐 자무쉬의 신작 ‘온리 러버스 레프트 얼라이브’에서 틸다는 뱀파이어로 등장한다. 하지만 다음 작품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다. 아직은 ‘설국열차’에서 그녀의 존재감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의 캐스팅은 시쳇말로 신의 한 수였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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