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공연 28
백자 공연 28
(part1에서 이어짐) 기소유예로 풀려난 백자는 군 입대를 결심했다. 수배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그는 인생의 한 가닥을 정리하고 싶었다. 오랜 기간 기록해온 자신의 시집과 일기를 내다버린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고2때 ‘영원의 초상’, 고3때 ‘친구여 오너라’, 대학 4학년 때 ‘들국화 무늬 수건’까지 총 3권의 시집을 남겼다. 군복무를 마친 1997년, 재입학을 신청해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노래패 후배들과 광운대 월계가요제에 참가해 대상을 수상하며 녹슬지 않은 노래실력을 뽐냈다. 참가 곡 ‘26달’은 자신의 군복무 기간을 의미하는 노래였다. 대학졸업을 앞둔 가을부터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김현성이 주도한 포크노래모임 ‘혜화동 푸른섬’에서 노래활동을 시작했다.

노래를 놓지는 않았지만 열정을 조절하며 2년 간 부진했던 학점을 따는데 전력을 다했다. 1999년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보컬그룹 ‘우리나라’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민중가요 노래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100만원을 종자돈으로 결혼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절을 겪었다. 이에 주변에서는 “가정 꾸렸으면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어야지 돈 안 되는 음악 같은 걸 왜 하냐? 공무원 시험이나 보라”는 핀잔을 들었다. 고집불통 백자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투쟁을 멈추지 않으리’, ‘달려달려’등 지금도 각종 집회 현장에서 불리어지는 노래들은 그 시절 백자가 만든 치열한 창작 민중가요들이다.
백자 서울 광화문 버스킹 7
백자 서울 광화문 버스킹 7
2000년대 중반 이후 디지털 세상의 가속화와 더불어 민중가요의 입지는 협소해져갔다. 척박한 환경은 음악과 무대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이에 민중가요 진영에서는 노래패와는 별개로 솔로 프로젝트 활동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선정위원회 특별상을 수상한 연영석은 가장 먼저 홍대 인디 신으로 진입한 탁월한 뮤지션이다. 손병휘의 뒤를 이어 백자도 2007년 홍대 앞 클럽 타에서 단독공연을 열며 홍대 로컬 신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인디뮤지션으로 변신해 2008년부터 홍대 클럽 바다비, FB등에서 펼쳐온 솔로 활동은 그가 선택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2007년 네이버에 블로그를 운영했던 그는 다큐멘터리영화 벽의 음악감독을 제안 받아 2년 정도 영화음악에 전념했다. 죽을지도 모르는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등반가들의 쓸쓸함, 고독의 정서가 그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포항 MBC에서 제2회 대한민국 창작포크가요제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영화음악 ‘벽’을 들고 출전해 2등에 입상했다. 2009년 산악다큐멘터리영화 벽에 수록된 음악들을 모아 비정규 소품집 걸음의 이유를 발표했다. 솔로 데뷔앨범이다. 인디제작시스템으로 발표한 그 음반은 공식 유통이 아닌 포털 사이트 다움에 있는 팬 카페를 통해서만 판매했음에도 재발매 음반까지 품절되는 예상치 못한 성과를 올렸다. 그로인해 생성된 추종자들과 평소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반한 100여명의 후원자가 주머니를 털어 정규 1집 제작에 힘을 보탰다.
백자 피쳐사진 128
백자 피쳐사진 128
2010년 발표한 첫 정규앨범은 13년 동안 만들어온 자신의 창작곡들을 응집시킨 달콤한 결실이다. 내가 중심인 디지털 세상에서 공동체를 중시하는 민중가요의 생존 가능성을 타진하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첫 걸음이었다. 하지만 1집은 콘셉트를 가지고 만든 노래는 아니다. 새롭게 창작한 곡은 ‘울고 싶던 날’ 한 곡 뿐이었고 오랜 기간의 감정변이과정을 담은 조각과 파편 같은 곡들을 모아서 제작한 음반이었다. 과격한 노래와 고독한 노래가 혼재된 1집의 혼돈스런 곡 구성은 음악적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했다.

타이틀 ‘가로등을 보다’는 1997년 군복무시절 말년 휴가 때 헤어진 첫사랑과의 이별 후 쓴 애절한 분위기의 곡이다. ‘어김없이’는 뜨거웠던 1980년대의 5월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매력이 느껴진다. ‘그대가 떠나가는 오늘 밤에는’은 사랑했던 사람, 떠나간 사람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화학 작용된 노래다. ‘울고 싶던 어느 날’은 청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가능성이 농후한 노래다. 전형적인 민중가요의 직설적 서술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그의 드라마틱한 창법은 이전의 민중가요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흥을 제시한 탁월한 트랙이다.

블루스 포크 곡 ‘나비’는 향후 그의 음악적 성취를 기대하게 하는 매력적인 트랙이다. 파워풀한 남성적 보컬을 구사하는 백자는 ‘상실’, ‘상처’, ‘외로움’, ‘이별’의 정서를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나른하게 들려준다. 오랫동안 노래해온 ‘조국’, ‘노동’, ‘민중’ 같은 서사가 아닌 탁월한 보컬 능력을 담보한 서정만으로도 그는 일반 대중의 공감대형성에 필요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한 자신의 독특한 이력과 삶을 그린 다큐영화 ‘걸음의 이유’가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2012년 시대의 공기와 인간의 삶을 스케치하는 그의 음악여정은 EP앨범 ‘담쟁이’로 이어졌다. 수록곡 ‘노란봉투’는 비정규노동자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다. ‘경포대에서’는 수배 중이던 1993년 며칠 동안의 도피 생활을 쓴 자작시가 모티브가 된 노래다.

소품집 ‘걸음의 이유’ (2009), 1집 ‘가로등을 보다’ (2010), EP ‘담쟁이’ (2012), 2집 ‘서성이네’ (2013)(왼쪽부터)
소품집 ‘걸음의 이유’ (2009), 1집 ‘가로등을 보다’ (2010), EP ‘담쟁이’ (2012), 2집 ‘서성이네’ (2013)(왼쪽부터)
소품집 ‘걸음의 이유’ (2009), 1집 ‘가로등을 보다’ (2010), EP ‘담쟁이’ (2012), 2집 ‘서성이네’ (2013)(왼쪽부터)

2013년 7월 정규 2집을 발표했다. 2집은 1집 발표 후 창작해 수많은 라이브 무대에서 들려준 신곡들의 기록적 측면이 강하다. 수록곡들은 대부분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던 노래들로 선곡되었다고 한다. 이는 팬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영한 아름다운 미덕이다. 문제는 편곡, 녹음, 믹싱, 마스터링의 과정이 동반되어 결과에 대한 변수가 가변적인 음반은 공연과 서로 다른 차원의 작업이란 함정이다. 빠트릴 곡이 없는 이번 음반을 들으면서 임팩트를 안겨주는 킬러 곡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곡 배치에서 뒤로 밀려 소외된 거의 마지막 트랙인 11번 ‘목마른 걸음’과 12번 ‘불면’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목마른 걸음’은 이청춘 소설 ‘서편제’를 읽고 만든 노래다. 부정하게 태어난 눈 먼 소리꾼 이복 여동생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간 오빠가 그녀가 토해내는 감동적인 판소리 가락을 듣고 오히려 위로를 받는 묘한 감정을 백자는 명곡으로 승화시켰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이란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불면’의 인트로에서 마치 메가폰을 사용해 노래하는 것 같은 인위적 목소리는 믹싱과정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기막힌 실험이다. 원래는 정상적으로 반주에 맞춰 노래했지만 믹싱 과정에서 악기 소리들을 뺐다. 이 실험은 불면에 시달리는 화자를 대변하는 마치 술에 취한 절망적 상태를 기막히게 표현해 진성부분에 힘을 배가한 백자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총선이 끝나고 패배감에 빠져 만든 신곡 ‘낙타의 발’은 더위와 끝이 안 보이는 사막에서 느린 걸음으로 걷는 낙타처럼 굳굳하게 걸어가자는 제안을 담은 록킹한 노래다.
백자 피쳐사진 154
백자 피쳐사진 154
모든 노래 제목을 한글, 영어, 일어로 표기한 것은 혹시 모를 해외진출 가능성을 위한 재미난 포석이란다. 그는 2달 일정으로 현재 전국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7월 20일 대구를 시작으로 현재 광주 공연까지 마친 상태고 앞으로 8월 9일 부산, 8월 17일 대전, 8월 24일 제주를 거쳐 9월 6,7일에는 서울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일정이다. “작은 규모라도 전국 투어를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팬들이 십시일반 마음으로 음반을 냈으니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현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는 지방공연에는 서울에서 내려와 주는 고마운 팬들이 있어 매 공연마다 50명 가까이 오셨습니다.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은 대학로에 있는 200석 규모의 한양레퍼토리 극장입니다. 제가 계단식 공연장 선호해 선택한 공연장입니다.”

사실 나이 마흔이 넘어 대중적으로 뜬 가수는 거의 없다. “평생 내 노래가 담긴 음반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노래가 히트해 뜨길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계속적으로 내 몸 안에서 곡이 나오고 공연을 하고 음반을 낼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성공적인 소셜펀딩의 모델링을 제시한 뮤지션이 그 과정을 반복할 수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백자는 2집의 상업적 성공을 발판으로 3집은 팬들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만들고 싶은 작은 욕망이 있다. 실현되길 기대한다. 그의 노래를 오랫동안 듣고 싶기에.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백자 프로필
1972년 4월 9일(음력) 전남 장흥 출생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졸업
1997년 광운대 월계가요제 대상, 노래모임 ‘혜화동 푸른섬’ 멤버
1999년 민중가요 보컬그룹 우리나라 결성
2007년 포항 MBC 주최 제2회 대한민국 창작포크가요제 2등
2009년 산악다큐멘터리영화 ‘벽’ 음악감독
2011년 다큐영화 ‘걸음의 이유’ 음악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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