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는 익숙함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정준일의 새 앨범 < Lo9ve3r4s >의 작명은 짓궂습니다. 의미 없는 숫자들은 이 단어를 고민하게 만들지만, 결국 이것은 Lovers,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리고 의도이건, 아니건 이 제목은 정준일의 앨범에 꼭 들어맞습니다. 굳은 맹세와 흐느끼는 실연, 거친 분노와 다정한 위로는 불쑥불쑥 등장하고 선율들은 서로를 닮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심지어 정준일의 목소리는 때때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기를 내쉬어요. 하지만 결국 노래들은 비슷한 것들을 떠올리게 하지요. 동경했던 누군가의 음성, 두근거리며 기다렸던 공연, 계절과 풍경과 그날의 일기 같은 것들, 그러니까 보편적인 추억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앨범은 소인이 진하게 찍혀 있는 우표와 같은 것이지요. 노래들은 만들고 부른 이가 어디를 거쳐 이곳에 도달했는가를 말해주고, 봉투 안에는 그의 지난 세기가 연표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처음 발표한 그의 앨범이 반가움을 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정준일은 미지의 별을 찾는 탐험가도, 가려진 땅을 일구는 개척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던 기억으로 남은 자리에서 이듬해의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안아줘’에서 발견한 싹눈은 계승하되 복제하지 않은, 품은 사람만이 틔워 낼 수 있는 빛깔을 가졌습니다. 기호의 완성은 고유함입니다. 늘 거기 있던 가지에, 정준일이라고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는 새 이름을 걸었습니다.

글. 윤고모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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