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손예지 기자]
대한민국에서 아이돌 래퍼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아이돌로서 기대되어지는 환상을 깨지 않는 선에서, 래퍼로서 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뿐인가. 대중에게 아이돌은 여전히 기획형 아티스트에 불과하다. 아이돌이 랩을 한다니, 누가 써주는 가사를 읊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이에 아이돌 래퍼들이 반기를 들었다. 엄격한 잣대와 가혹한 편견을 깨기 위해 믹스테이프를 세상에 내놓았다. 믹스테이프(Mixtape)란 비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해 무료 배포하는 곡을 말한다. 별도의 심의를 받지 않기 때문에 보다 솔직하고 거침없다. 3분짜리 음악방송 무대에선 들려줄 수 없던 진짜 이야기, 아이돌 래퍼의 믹스테이프로 들어본다.

방탄소년단 슈가 ‘Agust D’ 앨범아트 / 사진제공=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
방탄소년단 슈가 ‘Agust D’ 앨범아트 / 사진제공=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
‘어거스트 디(Agust D)’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슈가가 데뷔 후 공개한 첫 믹스테이프 앨범의 타이틀이자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난 16일 0시 공개된 ‘어거스트 디’에는 동명의 타이틀곡을 포함해 총 10곡이 수록돼있다. 전곡 프로듀싱은 물론, 신디사이저·키보드 등에도 슈가가 참여했다. 슈가는 이번 믹스테이프에 대해 “방탄소년단 슈가로서 내는 게 아니라 나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 한 가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4번 트랙 ‘스킷(skit)’ 中).

슈가의 말 그대로다. 그가 겪어온 고난과 독기, 그리고 성장이 10개의 트랙에 녹아있다. ‘좀 더 폼 나게 음악하기 위해 고향 대구를 떠나 상경한 십대 시절’부터( 5번 트랙 ‘치리사일사팔(724148) 中’ 일 년에 50만장의 앨범을 파는 아이돌이 되기까지(타이틀곡 ‘어거스트 디(Agust D)’ 中), 아이돌 래퍼로서 불특정 다수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남의 실패를 바라지 않기로”한다(8번 트랙 ‘토니 몬타나(Tony Montana)(Feat. 얀키)’ 中).

특히 7번 트랙 ‘마지막(The Last)’은 “잘나가는 아이돌 래퍼 그 이면에 나약한” 슈가를 노래했다. 슈가는 이 트랙에서 듣는 이가 걱정스러우리만치 심신이 지쳐있던 때를 고백했는데, 동시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던 자존심이 이젠 나의 자긍심이 돼. 내 팬들아 떳떳이 고개 들길. 누가 나만큼 해”라는 패기로 자부심을 드러낸다.

슈가의 믹스테이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수란이 피처링에 참여한 10번 트랙 ‘소 파 어웨이(so far away)’에서 슈가는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게 진짜 뭣 같은데. 모두가 달리는데 왜 나만 여기 있어”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화두를 꺼낸다. 이어 “그대의 자리가 어디일지라도 관대하리. 결국 시련의 끝은 만개하리. 시작은 미약할지언정 끝은 창대하리”라는 가사는 불확실한 미래에 고민하는 청중에게 위로로 다가간다.

이번 믹스테이프로 단순히 래핑의 테크닉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슈가는 이미 방탄소년단의 래퍼로서 매 앨범마다 랩 메이킹에 참여함은 물론, ‘점프(JUMP)’·‘투모로우(Tomorrow)’·‘이사’·‘렛미노(Let Me Know)’·‘고엽’·‘흥탄소년단’ 등 다수의 수록곡을 통해 프로듀싱 실력까지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대신, 이번 믹스테이프는 슈가에게 일종의 배출구가 될 것이다. 래퍼로서 또 프로듀서로서의 실력을 보다 많은 이에게 알렸고 동시에 그간 감춰두었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쏟아낸 만큼 채울 차례다. 이제 슈가의 앞에, 발전된 음악으로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기분 좋은 과제가 새로 놓였다.

손예지 기자 yeji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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