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정준일
정준일
거대한 스크린이 무대로 내려왔고, 이내 스크린 위로 색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대 위 정준일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작되는 노래는 ‘언더워터(UNTERWATER)’의 수록곡 ‘유스리스(USELESS)’였다.

지난 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정준일의 단독 콘서트 ‘너에게’는 지난 1월 발매된 ‘언더워터’의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정준일은 앨범 발매 후 프로모션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 노래의 분위기가 워낙 무거워, 웃으며 소개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방송에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시비(是非)를 가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SBS는 ‘언더워터’의 수록곡 ‘유스리스’와 타이틀곡 ‘플라스틱’이 방송에 나가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정했다. 두 곡이 허무하고, 염세적이라 청소년의 정서에 유해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준일
정준일
‘언더워터’에서는 쉽게 자살에 대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어느 날 밤에 이제 모두 끝을 냈으면 좋겠어”(‘유스리스’)라는 가사는 생을 마감하겠다는 각오로 들리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I don’t wanna live anymore)”(‘플라스틱’)라는 대목에서도 극도로 비관적인 자세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해석일지도 모른다.

이런 감상은 어떨까. ‘유스리스’의 화자가 ‘쓸모’ 여부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재단되는 현실에 현기증을 느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 필요 없어지면 필요 없는 놈인가요. 그럼 난 살아갈 가치도 꿈도 없는 놈인가요?”라는 가사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곧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싶다는 외침이다.

‘플라스틱’ 역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나는 플라스틱이 아니다(I’m not a plastic)”라는 절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다는 열렬한 고백이 그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 곡의 화자는 인간적인 관계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됐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살고 싶지 않다(I don’t wanna live anymore)”는 비관은 후에 “떠나고 싶지 않다(I don’t wanna leave anymore)”는 절박한 외침으로, 인간다운 삶을 향한 열망으로 귀결된다.

모든 해석은 청자의 몫이다.
정준일
정준일
제재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유스리스’와 ‘플라스틱’ 두 곡 모두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예술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맥락에 의해, 다시 말해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작품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혹 제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기준은 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SBS 가요 심의 관계자는 텐아시아에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되는 건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단어만 가려내는 기계적인 심의가 될 수 있다”면서 “그렇다고 해서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사의 가요 심의는 청소년을 기준으로 두고 있고, 두 곡의 가사가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다. 특히 음성 매체의 경우, 영상과는 달리 노출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도 있었다”고 밝혔다.

정준일의 ‘언더워터’가 유해한 앨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번 공연이 끝난 난 뒤 쏟아진 감상평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글을 남겼다. 누군가에겐 유해할 수도 있는 음반이, 직접 들은 관객들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된 것이다.

정준일의 ‘언더워터’는 정말로 허무하고 염세적이며, 때문에 청소년 정서에 유해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음반인가.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엠와이뮤직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