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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Dancing Please.”

1940년대 미국 재즈 클럽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적힌 입간판이 걸리곤 했다. 이는 춤을 추기 위한 댄스음악(스윙)으로 쓰였던 재즈가 예술적인 발전을 이루던 시기(비밥)에 재즈연주자들이 자신들의 연주를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일종의 저항과 같은 것이었다. 이달 27일 ‘전자음악의 알파와 오메가’ 크라프트베르크의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이 열린 잠실 종합운동장 서문주차장 돔스테이지에서 춤추는 관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모인 1,800명 가까운 관객들은 모두 3D안경을 낀 채 입체 영상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손에 잡힐 것 같은 사운드를 온 몸으로 느꼈다. 아마도 일부러 몸을 움직여 춤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감이 이미 춤추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이번 내한공연은 그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최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전자음악의 개척자가 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높지 않아 집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반대였다. 빠른 속도로 티켓이 팔려나갔고, 급기야 매진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여타 내한공연처럼 초대권을 뿌리지도 않았다. 티켓을 미처 구입하지 못한 팬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공연장에는 나이 지긋한 관객들보다 20~30대가 월등히 많았다. 젊은 층이 크라프트베르크에 열광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이번 공연은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에 맞춰 3D영상이 제공되는 콘셉트로 꾸며졌다. 랩탑과 신디사이저를 앞에 놓고 선 크라프트베르크 멤버들 위로 3D 영상이 펼쳐졌다. 인트로에 이어 첫 곡으로 ‘Robots’가 흐르자 영상 속에서는 지구로 향하는 우주선이 한국에 착륙을 시도했다. 입체영상 속 우주선이 객석으로 돌진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댔다.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3D로 보는 듯한 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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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ropolis’, ‘Computer World’, ‘The Model’ 등 모든 곡에서 음악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 함께 흘렀다. ‘Numbers’에서는 “아인스 쯔바이 드라이 피어”라는 딱딱한 독일어 억양에 맞춰 숫자들이 춤췄고, ‘Vitamin’에서는 알약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Machine’에서는 화가 몬드리안의 그림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연상케 하는 율동감 있는 그래픽이 이어졌다. 이처럼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과 영상은 다양한 상상을 이끌어냈다.

압권은 사운드였다. 영상과 함께 전자음악의 향연이 돔스테이지 구석구석을 뱀처럼 훑고 지나갔다. 보코더로 변조된 랄프 휘터의 목소리는 세월의 흐름을 무색케 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사운드는 최근의 과잉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비해 간명하고 치밀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이들의 음악은 자신들의 영향을 받았을 지금의 음악보다 오히려 참신하고 충격적이었다. ‘Tour De France’(1983년 곡)에 흐르는 멜로디는 H.O.T.의 ‘We Are Th Future’의 중반부와 상당히 유사하게 들리기도 했다. 이는 가요에까지 미친 크라프트베르크의 막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표곡 ‘Autobahn’이 흐르자 벤츠를 타고 독일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여행이 시작됐다. 원곡의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자 객석에서는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1975년에 나온 이 곡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첨단의 사운드였다. 영상 속에서는 카오디오에서 나온 음표들이 춤을 췄다. 드디어 ‘Radioactivity’가 나오자 공연장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노래 중간에는 대표적인 방사능 유출 피해지역인 체르노빌, 히로시마, 후쿠시마 등의 지역 이름이 거론됐다. 이어 한글로 ‘이제 그만 방사능’이란 문구가 화면에 나오자 관객들은 반가움의 탄성을 질렀다.

크라프트베르크 멤버들은 영상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공연 막판에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영상 속 멤버와 실제 멤버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은 ‘Musique Non Stop’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네 명의 멤버는 마지막 곡에서 각자의 솔로 연주를 선보이더니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아니 우주로 귀환했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제공. 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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