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로 최정상에 오르는 고아 소녀 이야기
'중독' 겪는 천재의 내면 조명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김지원의 탈고리즘≫
더이상 볼 게 없다고요? 아닙니다. 당신이 알고리즘에 갇힌 것 뿐입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가 '탈'알고리즘 할 수 있는 다양한 OTT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1950년대 남자들만의 세계였던 체스판에 도전장을 낸 천재 고아 소녀 베스'

"체크메이트."

어렸을 적 본 만화 중에 정의로운 괴도가 된 여고생이 '체크메이트'를 외치며 악마들을 봉인하는 만화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체크메이트가 체스 용어인 줄도 모르고 괴도의 멋진 모습에 감탄하곤 했죠. 이번에는 또 다른 '여전사'에게 마음을 뺏겼습니다. '퀸스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이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은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고아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월터 테비스의 1983년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고, 1950년대 냉전 시대가 배경입니다. 미혼모인 친모가 죽으면서 9살 베스는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켄터키의 한 고아원에 입소하게 되고, 고아원 지하실에서 생활하는 건물관리인 샤이벌에게 체스를 처음 배우게 되죠. 9살 베스는 고등학교 체스클럽 선수 12명과의 동시대국에서도 이들을 모두 가볍게 발라버립니다. 15살이 된 베스는 한 부부에게 입양되고, 양아버지가 집을 나가면서 양어머니와 살게 됩니다.

'퀸스 갬빗'은 체스 천재 베스의 성공기보다는 천재로서 베스가 겪는 압박, 고통 등의 감정에 더욱 집중합니다. 체스를 몰라도 베스의 눈빛, 분위기만으로도 승리의 쾌감, 패배의 나락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유죠.

베스는 갖가지 중독도 겪습니다. 고아원에서 먹인 안정제부터 술, 담배, 그리고 체스에 대한 집착, 승리를 향한 갈망까지 끊임없이 중독에 시달리며 불안해하고 초조해합니다. 불우했던 성장 환경으로 인해 베스 내면에 지독하게 깔린 불안정이 원인인 것 같네요. 체스가 있기에 '도박'에는 빠지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기게 되네요.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퀸스 갬빗'이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표정만으론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베스뿐만 아니라 고아원 동기, 양어머니, 모델 친구, 체스 동료들 등 베스 주변 인물들까지 무표정한 느낌이 강한데요. 그래서 '아군일까 적군일까', '도움을 주려는 걸까 계략을 꾸미는 걸까' 계속해서 궁금하게 하며 빠져들게 만듭니다.

또한 고아원 동기, 공식 경기 첫 대국 상대, 베스에게 굴욕을 줬던 체스 동료까지 베스가 밑바닥을 치고 있을 때 어렸을 적 인연들이 불현 듯 나타나 구원자가 돼주죠. 드라마라서 드라마틱하지만 베스를 위기의 늪에서 건져 올려준 그들에게 고맙더군요. 매력적인 외톨이 베스가 이대로 망가지는 건 안타까우니까요. 베스가 진정으로 사랑한 한 사람, 타운스도 그들 중 한 명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섹시한 캐릭터의 출연 분량이 너무 적은 게 아쉽네요.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퀸스 갬빗'의 한 장면 / 사진제공=넷플릭스
'퀸스 갬빗'이라는 제목은 체스 오프닝 방법 중 하나를 의미하는 용어에서 따온 건데요, 중의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왕의 수' 정도로 직역할 수 있거든요. 베스는 최종 목표 상대인 세계챔피언 러시아의 보르고프를 꺾을 '여왕의 수'를 뒀을까요?

체스가 둘이 하는 게임 같지만 생각해보니 혼자의 게임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예상한 수대로 상대를 끌고 간다면 우승하기 때문이죠. 내가 짠 길 위에 상대를 놓고 컨트롤하면 이기는 겁니다. 1950년대 남자들만 가득했던 체스판에 도도하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 베스. 흑백의 기물이 나란히 정렬된 체스판을 앞에 두고 너무나 고고하고 아름답게 턱을 괴고 상대를 바라보는 베스. 여러분도 그녀의 눈빛을 보는 순간, 빠져들고 말겁니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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