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117편의 러브레터'입니다.
'117편의 러브레터'는 1945년 홀로코스터에서 살아남은 후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청년과 19살 소녀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쌓아가는 이야기. 어떤 것도 극복하게 하는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영화탐구] '117편의 러브레터', 사랑을 포기한 채 순순히 죽으라고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비극을 다룬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단일 민족의 비극을 그린 영화로는 아마 가장 많은 편수를 자랑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극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고 비극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기는 불과 몇 년 동안 600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빼앗겼으니 사연도 정말 많았으리라. 유대인 학살의 끔찍한 결말을 마주하면서 관객은 그들이 겪은 고통에 몸서리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처참한 환경에서도 사랑 이야기가 하나쯤 있지 않았을까. 그런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117편의 러브레터'(감독 페트르 가르도스)를 감상하기 바란다. 사랑의 위대함을 새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에서 빚어진 파괴와 혼란으로 교통편이 만만치 않았고, 승전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다들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기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헝가리 출신 25세 청년 미클로시(밀란 쉬러프)는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선언을 받는다. 결핵균이 그의 폐를 거의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요양시설에 있던 그는 어디선가 학살에서 살아남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여성들의 명단을 입수했고 일일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모두 117통의 편지다.

미클로시가 가상으로 설정한 117명의 애인들 중 8명이 답장을 보내왔고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여인이 바로 릴리(에모크 피티)다. 신장이 거의 망가진 상태로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19세 소녀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애타게 어머니의 소식을 기다리던 중 미클로시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채 성홍열에 시달리는 소녀와 매일 저녁 고열이 오르내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청년의 사랑은 그렇게 비극적인 환경에서 시작된다.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 / 사진제공=알토미디어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 / 사진제공=알토미디어
'117편의 러브레터'를 보면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많은 애정물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처참한 조건에서 꽃을 피운 사랑은 흔치 않았다. 특히 미클로시가 릴리를 기차역에서 처음 만나던 때의 감동은 영화의 백미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중증 환자가 아니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질긴 생명의 힘으로 이제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전개가 무척 탄탄했다. 편지가 오가면서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 건강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라든가, 미클로시가 큰돈을 들여 릴리에게 줄 선물을 장만하는 사연이라든가, 환자를 살리려는 스웨덴 의사들의 진지한 헌신이라든가, 릴리를 입양해 조금이라도 죄의식을 덜어보려는 독일인 부부, 순회 랍비 크론하임, 그리고 결핵환자가 등장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 등이 흥미를 돋궈줬고 영화의 밀도를 더해줬다.

'117편의 러브레터'의 기본 틀은 현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릴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방식인데 현재는 천연색으로, 과거는 흑백으로 표현한다. 요즘 제작되는 영화들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라 그 자체로는 별로 특별할 게 없지만 사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 흑백필름이 훨씬 정교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고급 옷감을 보듯 짜임새가 매우 훌륭했다. 탄탄한 구성이다.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 / 사진제공=알토미디어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 / 사진제공=알토미디어
멜로물임에도 불구하고 '117편의 러브레터'가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도 역점을 두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비록 목숨을 건졌다한들 그 엄청난 트라우마까지 이겨낸 것은 아니었다. 갖가지 공포와 환영과 질병이 여전히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미클로시와 릴리가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도 거기서 발견된다. 어차피 죽을 목숨, 어떤 난관을 헤쳐 나가더라도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맺어져야 한다. "사랑을 포기하고 순순히 무덤으로 들어가라고요? 내 손으로 태운 시체가 1421구나 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어찌 되었을까. '소피의 선택'(1982)에서처럼 결국 극단적 선택을 택했을까, 아니면 '메모리'(2015)에서처럼 끝까지 복수의 집념을 불태웠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간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봤다. 일단의 유대인들이 스웨덴으로 실려와 치료를 받았고 결국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려주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멀지 않으리." 어느 유대인이 수용소 벽에 써놓은 문구라고 한다.

미클로시는 전쟁 전에 출판업에 종사했지만 또한 시인이다. 그가 릴리에게 지어준 시를 들어보자. "고인 얼음 위에 발을 디디듯 / 내 발 아래 깨어지는 서릿발 / 내 마음을 만지려면 조심하소서 / 얼어붙은 내 비밀의 바다가 / 손짓 하나로 깨질 수 있으니."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잘 묘사돼 있다.

감독인 피테르 가르도시가 원작소설을 썼고 부모님의 실제 러브 스토리를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 실화의 감동이 절로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새벽의 열기', 곧 미클로시의 체온이 새벽마다 38.2도로 올라갔다는 사실에서 따왔다. '117편의 러브레터'보다 훨씬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제목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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