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어디 갔어, 버나뎃'입니다.
'어디 갔어, 버나뎃'은 과거엔 건축계 아이콘, 현재는 사회성 제로 문제적 이웃이 된 버나뎃이 갑작스런 FBI 조사 도중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입니다.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놀라운 시너지, 행복을 찾아가는 버나뎃의 유쾌한 여정이 웃음과 감동, 따뜻한 메시지를 선사합니다.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포스터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포스터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관객들은 일반적으로 결말을 예측하기 어려운 영화에 맘이 끌리곤 한다. 만일 시작부터 결론이 짐작되는 경우라면 자칫 긴장감을 놓을 수 있어서이다. 하지만 관객의 구미에 맞춰 연출하는 작업이 언제나 쉽진 않다. 이미 많은 영화를 섭렵한 약은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를 앞서서 짐작해내는 데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더욱 무엇인가 낯선 영화가 매력적인 법이다. 이를테면 주변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면 일단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명성 높은 맥아더 상을 받은 바 있으나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사회의 위협이 되는 건축가….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디갔어, 버나뎃'(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눈에 띈 이유다.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남편 엘지(빌리 크루덥)와 15살 딸 비(엠마 넬슨)와 한 가족이다. 엘진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잘나가는 프로그래머이고 비는 공부를 썩 잘 하는 편이라 들어가기 어렵기로 소문난 사립 고등학교에서 입학허가까지 받아놓은 상태다. 유능한 남편과 모범생 딸에 더해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만 버나뎃의 인생은 무엇인가 늘 불안하다. 그녀는 본디 LA에서 이름을 날리던 건축가였는데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시애틀로 이주했고 지금은 건축 일은 등한히 한 채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커피 잔에 고래를 가두어놓았다고나 할까. 사실 도입부로만 볼 때 그리 색다를 게 없다. 다른 영화들도 그 정도의 설정은 곧잘 해 놓으니 말이다.

버나뎃은 감정기복이 심하고 무엇엔가 집중하면 넋이 빠지기 일쑤며 늘 제 멋대로 행동한다. 그런 이유로 이웃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몰려간 상태다. 특히 옆집의 오드리와 만날 때마다 맹렬한 적대감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사실 오드리 입장에서는 한 동네 구성원으로 기본적인 예의 정도를 지켜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오드리 역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는 미국의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SNL에 고정출연할 정도로 역량 있는 배우이다. 그렇게 매번 부딪치는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버나뎃과 오드리 외에 부인의 사정을 건성으로 듣는 남편, 엄마와 모든 일을 나누는 친구 같은 딸, 엘지의 가정 사에 이르기까지 오지랖을 발휘하는 주제넘은 비서 수린(주디 그리어), 그리고 건축가로서 버나뎃의 진가를 알아주는 폴(로렌스 피시번) 등 감독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계를 설정했고 그 관계설정들을 기반으로 이야기 구성에 탄력을 부여했다. 그렇게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덕분에 버나뎃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보이후드'(2014), '스쿨 오브 락'(2003) 등의 명작을 남긴 감독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스틸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스틸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영화 중간쯤에 이르러 잠시 '이 영화가 도대체 관객을 어디로 인도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뜬금없이 건축가 버나뎃의 인생과 업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다큐멘터리에 그려진 그녀는 촉망받는 건축가며 저명한 건축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예술가다. 그런데 현실은 고작 카펫 밑에 짓눌려있는 넝쿨이 자라도록 작은 구멍이나 내고 있는 처지였다. 반경 20마일 내에서 모든 건축 재료를 구했던, 자연친화적 건축가로서 감각이 아직 남아있다고나 할까. 감독의 의도대로 큰 맥락에서 버나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코미디 영화로서 '어디 갔어, 버나뎃'의 압권은 버나뎃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엘지과 수린과 심리상담가 자넬 커츠 박사(주디 그리어)와 FBI 요원이 나란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는 대목이다. 마침 폴에게 온갖 넋두리를 늘어놓고 오는 길이라 버나뎃의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고급스런 유머를 맛보았는데, 특히 자넬이 "좋은 생각이에요. 다를 심호흡하지요"하며 등장할 때 정점을 도달했다. 온갖 희한한 명칭의 정신과 증상으로 무장한 자넬이 '우울증에 적응장애와 사회불안장애'라는 무시무시한 병명을 버나뎃에게 부여할 참이었다. 그저 감정기복이 남들보다 심한 정도인데…. 하이코미디의 본분인 풍자가 잘 살아있는 대목이다.

그에 더해 버나뎃은 미국사회를 심하게 꼬집고 있다. 물론 건축가의 시각으로 본 것이긴 하지만 그녀가 폴과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약 5분 정도의 내용이 아주 좋았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어떻게 자연이 부서지고 기형적으로 설계된 도로와 건축이 어떻게 도시를 망치는지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버나뎃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독설에 가까웠다. 영화를 보실 때 꼭 귀 기울여 들여야 할 대목이다.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스틸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스틸 / 사진제공=디스테이션
영화를 한 번 더 봐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다시 보면서 자연스럽게 첫 장면에 집중했다. 그랬더니 카약을 타고 남극 빙하들 사이를 여유롭게 노 젓는 버나뎃 뒤로 멋진 암시가 담긴 비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뇌는 세월이 지나면서 온갖 위험신호에만 집중하느라 삶의 아름다움을 다 잊어버린다는 탄식과 더불어 뇌 역시 가끔씩 리셋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들어있었다. 그 말을 맘에 담아두고 영화를 보니 이번에는 훨씬 이해가 잘 됐다. 독자 분들도 첫 장면을 꼭 맘에 새겨두길 바란다. 곧 이어 벌어질 현란한 희비극(Tragicomedy)에 정신을 뺏기기 전에 말이다.

이 영화는 뉴욕타임즈에서 84주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른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복합적인 성격의 버나뎃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배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케이트 블란쳇을 캐스팅 했는데 '블루 재스민'(2013)의 재스민 역과 잘 통하는 역할이다. 무언가 정서가 불안한 인물로 말이다.

한편의 코미디 영화로서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지만 결말이 상투적인 게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이 만한 게 어디인가. 수준 있는 코미디다. 추천한다.

박태식(영화평론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