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믿고 싶은 황홀경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새로운 이야기 구상에 곤란을 겪고 있던 한 작가가 파텔이라는 사람을 찾아간다.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아주 오래전 이야기”라며 입을 뗀 파텔의 이야기는 인도의 한 동물원에서 시작된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동물들과 함께 자란 소년 파이(수라즈 샤마르)는 동물원을 팔고 캐나다로 이주를 결정한 가족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넌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폭풍우는 순식간에 배와 파이의 가족, 그리고 동물들을 집어삼킨다. 가까스로 구명선에 올라 탄 파이는 홀로 목숨을 건지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에 젖기도 전에 그가 맞닥뜨린 것은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다. 굶주린 호랑이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파이는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227일 동안 생존을 위한사투를 벌인다.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이 모험담을 끝맺는 순간까지도 파텔의 표정은 한결같다. 그리고 청자이자 관객인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관람지수 10.

‘이안’에 우주 있다 – 8점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믿고 싶은 황홀경

신화는 증명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진짜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진짜가 되는 것. <라이프 오브 파이>는 신화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위대한 신화는 이야기 속 신의 전능함이 아니라 듣는 이를 매혹하는 훌륭한 스토리텔링에 의해 완성된다. 그래서 본디 위대한 신화는 탁월한 이야기다. 아들이 깨끗한 영혼을 갖길 바란 아버지에 의해 피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친구들의 놀림에 시달리던 소년은 스스로를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해하는데 사용했다는 신비로운 숫자 ‘파이’라 명명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이야기를 통해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듣는 이를 설득시키는 영화 전체의 주제 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동시에 신화, 소설, 영화가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매혹’이라는 원형에 빚을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라이프 오브 파이>는 집채 만한 고래가 하늘로 솟구치는 태평양 한 가운데서 벵갈 호랑이와 대치하며 살아남은 소년의 흥미로운 모험담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안 감독의 대답이다. 그에게 영화란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그래서 이안 감독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완성한 것이 흥미롭다. 물론 일차적으로 원작의 상상력을 구현할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필수불가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특수 안경을 쓰고 눈앞에 두둥실 떠다니는 입체 영상과 마주하는 3D 영화는 환상성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가짜로서의 영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험담의 구전이라는 가장 담백하고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3D라는 가장 극적이고 진화한 방식으로 담아낸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의 손길 아래 영화의 본질과 미래를 동시에 거머쥐었다.한 사람의 것이라 믿기 어려운다채로운 장르와 소재로 한없이 넓고 깊은품을 선보여온거장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우주를 펼쳐놓았다. 아름답고 믿고 싶은 황홀경이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