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F+10] 그렇게 즐겁게, 게이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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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기적. 20대 후반 정체성의 혼란기를 겪던 이혁상 감독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커밍아웃을 했다. “처음으로 남자와 연애다운 연애”를 했던 그의 서른 살은 “참 행복했던 한 해”였다. 두 번째 기적. 막연하게 “만약 영화를 찍게 된다면 내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는 첫 연출작으로 다큐멘터리 을 선택했다. 2년을 훌쩍 넘긴 작업 기간을 거친 은 제 15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됐다.

이혁상 감독이 스태프로 참여했던 , 에 이어 탄생한 은 “성소수자 3부작”을 완성시킨 셈이다. “성적소수문화환경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트렌스젠더()와 레즈비언() 얘기를 했으니 이번엔 게이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 단체에서 유일한 게이였던 제가 자연스럽게 연출을 맡게 됐고. 원래는 종로의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우선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를 친숙하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에는 이성애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로 ‘컷’을 외치는 소준문 영화감독,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 동성애자 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장병권, 친구사이(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내 합창단 친구들 덕분에 “게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낼 수 있었다는 요리사 최영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HIV/AIDS 감염인 인권운동을 하는 회사원 정율이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는 누군가를 치유하는 좋은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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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소준문 감독은 이혁상 감독이 “페르소나”라고 부를 정도로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인물이다. “저도 영화현장을 잘 아는데, 자유롭다고들 얘기하지만 굉장히 마초적인 곳이거든요. 딱 봐도 준문이가 거기서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이더라고요.” 반면, “처음에 낯도 많이 가리고 긴장하더니 둘이 진탕 술 마시면서 벽을 허문” 요리사 최영수는 이혁상 감독이 “게이답게”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게 해 준 ‘슬픈’ 주인공이다. “1차 편집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영수가 뇌수막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한 달 쯤 있다가 떠나더라고요.” 그렇게 계획에 없던 영수의 장례식 장면이 추가됐지만, 이혁상 감독이 담아낸 영상은 이상하게도 마냥 슬퍼 보이지만은 않았다. 빈소에 모인 합창단원들은 생전 영수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합창하고, 감독이 촬영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밝게 웃는다. “영수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를 불러주고 그가 행복했던 한 때를 같이 보고, 그렇게 게이답게, 즐겁게 보내주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우리만의 의미 있는 방식이랄까?”

“아웃팅 문제도 있고 해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한 번은 여기가 어디라고 카메라를 들고 설치냐는 얘기도 들었어요.” 다들 예상했겠지만, 촬영 과정은 “종로 커뮤니티에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회상할 만큼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대낮에도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어두운 게이 바가 아닌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종로의 변화를 담아냈고, 이제 “여전히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성애자인 척 연기하면서 종로조차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으려 한다. “다큐멘터리는 누군가를 치유하는 좋은 수단”이라는 그의 말이 단지 허공에 떠도는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게이라는 걸 확인해 볼 용기도 없었고, 섹슈얼리티나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보면서도 계속 자신과 싸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남자와의 첫 연애에서 한 달 만에 차였”던 경험을 “허허허”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고, SBS 에 대해서 “드라마는 참 좋은데, 이거 보고 다들 게이가 송창의처럼 예쁘고 잘생겼다고 생각할까봐 제가 다큐멘터리를….”이라는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여유도 생겼다. 아파 본 사람이 그 아픔을 잘 안다고 했던가. 이미 자기 자신을 치유한 감독이 만든 은 그래서 “주인공들조차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은” 따뜻한 작품이다.

물론 이 나왔다고 해서 세상이 180도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이혁상 감독은 ‘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는 광고가 실리는 “수상한 시절”을 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분명히 다큐멘터리에서 게이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는데, 게이들은 도대체 어떤 직업군에 많냐는 질문”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변화의 가능성, 긍정의 힘을 믿는다. PIFF에서 은 첫 상영분이 매진되면서, 그의 두 번째 기적은 꽤나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아직은 극 영화보다 다큐멘터리를 욕심내서 잘 만들고 싶다”는 그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과 예술은 공존할 수 없다”며 멋쩍은 미소와 함께 ‘솔로 인증’을 했던 그에게 멋진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커밍아웃과 에 이은 그의 세 번째 기적으로.
[PIFF+10] 그렇게 즐겁게, 게이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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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부산=이가온 기자
사진. 부산=채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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