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에서 이별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한 이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었다면, 그리고 어린 나이에 그 이별을 겪어야 했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얼굴로 성장하게 될까. 아홉 살 진희(김새론)가 예쁜 옷을 입고 케이크를 사들고 사랑하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도착한 곳은 보육원이다. 그렇게 보육원에 홀로 남겨진 진희는 살면서 처음 겪은 이 이별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홉 살 때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계 감독 우니 르콩트 첫 번째 장편 영화 <여행자>는, 아주 오래 전에 겪었지만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이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자, 인생이라는 여행의 첫 발자국에 대한 기록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번 꼭 안아주세요

영화 속 진희를 지배하는 감정은 “데리러 올게”라는 아버지의 약속이 거짓이었다는 것에서 오는 배신감과, ‘사랑받을 만 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이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 어린 진희가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진희는 보육원에서 도망치려고 하기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말하지 않고 먹지 않기’를 통해 지금 제 앞에 놓인 삶을 거부하기도 한다. 조금씩 보육원에 적응하면서 숙희(박도연)라는 친구도 만나게 되지만, 그것은 적응일 뿐 지금의 삶에 대한 인정은 아니다. <여행자>는 그랬던 진희가 버려짐의 기억을 결국 인정하고 보육원 밖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기까지의 1년을 담아낸다.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과하게 감정을 쏟아 내거나 그 시절을 의식적으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아, 영화는 담담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낸다. 제작자로 참여한 이창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1975년의 풍경들은 추억에서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시간 속의 한 시절로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여행자>를 더 좋은 영화로 만든 것은 배우들의 연기인데, 장애 때문에 보육원을 떠나지 못하고 아이들의 누나 노릇을 하며 첫사랑의 아픔을 겪는 사춘기 소녀 예신을 연기한 고아성은 <괴물>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성숙한 표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슬픔을 털어내는 진희 역의 김새론은, 작은 몸에 슬픔이 꾹꾹 눌러 담아 놓은 듯한 연기로 영화와 현실, 감독의 과거와 진희의 삶 사이의 경계를 지운다.

상처는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훌쩍 사람은 성장한다. 진희가 1년 만에 작아져 버린 옷을 고쳐 입고 보육원 밖의 세상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 관객들은 진희가 몸만 자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개봉에 앞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를 본 뒤, 우니 르콩트 감독에게 “당신을 꼭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던 어떤 관객처럼,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목걸이를 걸고 외롭게 파리의 공항에 선 마지막 진희의 표정을 만나는 순간 당신도 진희를 꼭 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손 내밀어 줄 사람이 필요한 진희의 외로운 여행은, 10월 29일에 시작된다.

글. 윤이나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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