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 누군가는 봄바람에 설렜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막 시작된 새 학기에 의욕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이유도 없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12년 전, 실제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을 다룬 <이태원 살인사건>(선필름-영화사 수박 제작, 홍기선 감독)이 8월 31일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공개되었다. 가족에겐 성실하고, 여자친구에겐 다정했던 대학생 조중필(송중기)은 우연히 들른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목과 가슴 등 아홉 군데를 난자당했다. 미 군속의 아들 피어슨(장근석)과 재미교포 알렉스(신승환)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꼿꼿한 박 검사(정진영)는 진범을 잡기 위해 둘을 몰아 부친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두 사람. 그러나 서로를 살인자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목격자임을 내세우는 둘의 증언은 계속 엇갈린다. 자, 이제 박 검사는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인가?

실제 원양어선 선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그린 <선택>으로 실화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온 홍기선 감독은 이번에도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을 다시 불러냈다. 당시 미군의 흉악범죄 증가로 흉흉했던 분위기, 둘 중 한 명이 범인임에 분명한 상황에서 둘 다 무죄로 풀려난 점 등 당시 국민의 공분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은 스릴러라는 외피를 쓰고, 묵은 먼지를 털어내려 한다. “12년 전 우리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막걸리 스릴러”라는 배우 정진영의 말은 9월 10일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릴러로 포장한 기록영화입니까?

그러나 거듭 상대의 유죄만을 되풀이하는 법정에서도, 과장된 교포연기와 검사의 다그침이 오가는 취조실에서도 스릴러 특유의 쾌감을 찾을 수 없다. 수사나 재판 등 실제 사건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판결마저 현실과 동일하게 진행된 방식 탓이라고 이유를 돌리기엔 <살인의 추억>, <조디악> 등 실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영화적 재미를 획득한 영화들이 많다. 그러나 당시의 사건과 그 이후의 추이들을 별다른 장르적 고민 없이 옮겨 놓은 영화는 확실한 노선을 정하지 못한 채 주춤거린다.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종류의 정의 실현으로 보는 내내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주지도, 실제 수사 과정들을 촘촘하게 직조하지도 못한 채 화장실에서 싸늘하게 식어간 조중필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청년을 거듭 보여줌으로서 관객의 공분 혹은 감정 이입을 유도하지만 긴장감 없이 느슨하게 이어진 이야기 안에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 결과 감동과 스릴러,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사건을 잊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대로 영화는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 외의 의미를 가지긴 힘들어 보인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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