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이 글에는 러브리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묜, 워트카(보드카), 톨스토이. 1983년판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19권 러시아 동화집에 실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인공과 그가 마시던 술, 그리고 이 작품의 작가다. 내가 러시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만든 단어들이다. 특히 벌이가 옹색한 구두장이 세묜이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마을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면서 마신 워트카가 자못 궁금했다. 털외투가 없어도 훈훈한, 털외투 같은 건 평생 없어도 되는, 셰묜을 천하태평으로 만드는 워트카…. 어린 나의 생각 속으로, 톨스토이의 문장은 뼛속까지 시린 북국(北國)과 핏속까지 나른한 워트카를 빚어내며 파고들었다.

13년 차 부부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보리스(알렉세이 로진)는 이혼을 앞두고 살던 집도 내놓았다. 제냐는 집을 보러 온 젊은 부부에게 뚱한 아들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의 머리를 툭 치며 열두 살인데도 예의가 없다고 쏘아붙인다. 이윽고 밤이 되고, 제냐와 보리스는 이혼 후 책임져야 하는 알로샤를 맹렬하게 떠넘기려 한다. 화장실에서 이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알로샤는 차마 기척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눈물을 흘린다.

보리스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앳된 마샤(마리나 바실리예바)가 있다. 이혼을 문제 삼는 상사가 있는 회사에 다니는 그는 혹여 이혼이 해고로 이어질까 긍긍한다. 그것이 보리스의 유일한 고민거리다. 오래전, 제냐는 첫 상대였던 보리스와 임신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다. 낙태도 출산도 무서웠던 그녀는 처음 알로샤를 낳고 마주한 순간에도 구역질이 일었으나 차츰 안정을 찾았다. 제냐 역시 꽤 연상이지만 부유한 안톤(안드리스 카이스)이 있다. 그녀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새벽녘에야 귀가해서 달뜬 얼굴로 폰을 뒤적이다가 잠이 든다.

제냐에게 알로샤의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알로샤가 학교를 이틀간 결석했다고. 긴 시간 아들의 부재마저 몰랐던 제냐는 경찰에 신고를 한다. 경찰은 통계는 희망적이고, 가출 아동은 결국 돌아온다는 형식적인 답을 내놓는다. 제냐는 경찰이 권한 수색 구조 단체에 도움을 요청한다. 제냐와 보리스도 뒤늦게 부모 노릇을 하려 들지만, 현실은 알로샤를 찾는 것이 까마득할 따름이다.

지난 18일 개봉한 ‘러브리스’는 제70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이다. ‘리턴’(2003) ‘엘레나’(2011) ‘리바이어던’(2014)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작품이다. 그는 러시아의 스산하고 음울한 공기를 스크린에 풀어놓았다. 영화에서도 라디오나 TV 방송을 통해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배어든다. 그리고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는 무결한 서사로 러시아의 단면을 담아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안팎으로 서늘한 울림을 전한다.

제냐와 보리스는 서로 만나면 으르렁거린다.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며 폭언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이에게서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의 연인에게 당신 덕에 사랑이 뭔지 알겠노라며,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며 속살거린다. 자신의 아들에게도 주지 않았던 사랑스러운 눈길로 응시하면서.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그들의 결말은 별반 다르지 않다. 권태로움은 일상을, 즉 사랑을 잠식한다.

제냐는 규칙과 휸육을 중요시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제냐는 알로샤가 없어진 순간에도 애를 지웠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제냐의 엄마는 딸을 향해 널 낳은 게 실수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자식을 향한, 대를 잇는 모녀의 패설(悖說)에서 악취가 난다. 제냐에게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눈길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없었다. 그래서 진종일 스마트폰만 쓰다듬던 그녀는 알로샤와 관련된 질문을 하는 수색 구조 단체 담당자에게 “그런 것 같아요”라는 미적지근한 답밖에 할 수가 없다. 아빠인 보리스도 매한가지다.

알로샤가 끅끅 흐느끼던 모습을 떨칠 수가 없다. 영화에서 초반에만 등장하지만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도 따라붙는 건 알로샤의 얼굴이다. 겨울 숲의 휘어진 나무들 틈에서 시간을 때우던, 어쩌면 부모에게도 흐릿해졌을 소년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다. 심이 굵은 연필로 꾹꾹 써내려간 듯한 영화는 심장을 슬픔으로 적신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엘은 사람에게 깃들여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러브리스’에서 어른들은 내내 사랑을 칭얼거린다. 더 이상 사랑이 깃들지 않은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갈지 불현듯 궁금해진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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