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 스틸컷.
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 스틸컷.
못내 아쉬운 순간이 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속에 머무를 때. 그런 날에는 진즉에 잠에서 깼음에도 눈을 꾹 감은 채 달아나려는 꿈의 꼬리를 질끈 문다. 대개 그런 꿈들은 천연색으로 실감이 크다. 소녀로 칭해지던 시절 디즈니는 단골 배경이었다. 꿈속의 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도, 1인칭 관찰자 시점이기도 했다. 이따금 나는 신스틸러로 입장하기도 했다. 백설공주의 일곱 번째 난쟁이, 피노키오의 지미니 크리켓, 덤보의 생쥐 친구 티모시, 앨리스의 하트 여왕…. 곰곰이 생각하면, 어린 시절 디즈니의 한 장면에 입장하고 싶지 않은 소년 혹은 소녀가 있었을까 싶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영국. 런던 체리트리가 17번지에 살고 있는 마이클 뱅크스(벤 위쇼)는 화가로서의 삶을 접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근무했던 은행에서 시간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 대신 애나벨(픽시 데이비스), 존(나다니엘 살레), 조지(조엘 도슨) 3남매를 키우기 위한 아빠로서의 선택이다. 다행스럽게도 누나 제인(에밀리 모티머)과 오랜 가정부 엘렌(줄리 월터스)이 일상의 무게를 함께 감내한다. 그런데 마이클이 깜박한 대출금 이자 때문에 집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고 은행과 약속한 금요일 자정까지 대출금을 대체할, 아버지가 남긴 증권을 찾아야만 한다.

어느 날,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마법사 보모 메리 포핀스(에밀리 블런트)가 하늘의 연을 타고 뱅크스 집안에 다시금 찾아온다. 무엇이든 꺼내면 나오는 마법 가방과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리는 앵무새 우산과 함께. 마이클과 제인은 메리 포핀스가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딱한 처지로 이해하고, 매월 둘째 화요일은 쉬겠다는 조건을 수용하며 보모로 받아들인다. 3남매는 작년에 철이 많이 들어서 보모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이내 메리 포핀스에게 반하고 만다. 메리 포핀스와 점등원 잭(린-마누엘 미란다)이 이끄는 마법의 황홀경에 첨벙 빠지면서.

지난 14일 개봉한 ‘메리 포핀스 리턴즈’는 1964년작 줄리 앤드류스 주연 ‘메리 포핀스’의 속편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다시 만나는 이야기는 전편에 대한 오마주와 클래식한 감성으로 넘실거린다. 메리 포핀스가 마이클과 제인을 향해 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여전히 잘 웃는다고 할 때, 메리 포핀스는 설명 같은 건 안 한다고 할 때, 아이가 어른을 돌보는 것이 뱅크스 집안의 전통이라고 운운할 때 전편이 쓱 겹쳐지면서 엷은 미소를 짓게 됐다. 특히 로얄 덜튼 도자기 세상은 전편의 결 위에서 펼쳐지는 유쾌한 시퀀스다.

뮤지컬 영화에 능란한 롭 마샬 감독은 ‘시카고’에서처럼 빼어난 뮤지컬 시퀀스를 선사한다. 에밀리 블런트와 린-마누엘 미란다, 50여 명의 앙상블 배우들이 펼치는 군무 ‘Trip a Little Light Fantastic’은 백미다. 반짝이로 불리는 점등원을 맡은 린-마누엘 미란다는 브로드웨이 최고의 뮤지컬 스타답게 무려 8분에 달하는 곡에 반짝반짝 광을 낸다. 또한 그윽한 노래들도 매력적이다. 메리 포핀스가 아이들의 슬픔을 쓰다듬는 곡 ‘The Place Where Lost Things Go’와 마이클의 절절한 망부가(亡婦歌) ‘A Conversation’.

초록빛 연을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를 맞이한 이들은 초록 코트를 입은 애나벨, 초록 베레모를 쓴 존, 초록 부츠를 신은 조지다. ‘벨벳 골드마인’ ‘캐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에서 최고의 의상을 선보였던 샌디 파웰이 의상으로 빚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도 찾아든다.

언제 어디서든 마법을 쓸 수 있지만 묵묵히 지켜보다가 2퍼센트 부족한 순간에만 마법을 쓰는 메리 포핀스는 에밀리 블런트를 만나면서 청아한 매력까지 더해졌다. 전편의 줄리 앤드류스 만큼이나 고혹적이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통해 무르익은 연기를 선보이던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사랑스러운 연기,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추가되었다.

매양 ‘사랑스럽다’는 수식이 따라붙는 배우 메릴 스트립은 메리 포핀스의 사촌 톱시로 등장한다. 매달 둘째 수요일에는 거꾸로 뒤집히는 물건 수리점을 운영하는, 세상이 거북이처럼 뒤집히는 고장 난 날을 가진 자의 비애를 경쾌하게 그려낸다. 욕망이 아니라 욕심만 앞서는 욕심꾸러기 은행장 윌킨스 역의 콜린 퍼스와 푸근한 풍선 할머니 역의 안젤라 랜즈베리도 반가운 얼굴들이다. 전편에서 굴뚝청소부 버트와 은행장 도스로 1인 2역을 했던 딕 반 다이크가 도스 주니어로 다시 얼굴을 비친다. 93세의 고령에도 춤과 노래를 소화하는 모습을 마주하니 전편에서 펭귄들과 춤을 췄던 젊은 시절의 그가 겹쳐지면서 뭉클한 감정에 젖어든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메리 포핀스 리턴즈’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기에. 나 역시 아이가 된 기분을 잊고 지냈다. 이 작품은 잊어버린 감정을, 동심을 차르륵 펼치게 한다. 그래서 한때 소녀였던 나는 디즈니 세상 속으로, 메리 포핀스 속으로 입장했다. 철이 들지도, 늙지도 않는 영혼을 가진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그곳으로. 문득 1964년작 ‘메리 포핀스’의 행복한 주문이 뇌리를 스친다.

수퍼칼리프래질리스틱엑스피알리도셔스(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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