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스탠바이, 웬디’ 포스터/사진제공=판씨네마
영화 ‘스탠바이, 웬디’ 포스터/사진제공=판씨네마
영화계에서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이슈다. 우주를 지키는 영웅들의 영화만큼이나 소소한 행복을 꾸려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영화가 줄을 잇는다. ‘스탠바이, 웬디’는 소확행 외의 희망을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 의미 있는 감동을 전한다.

영화는 소소하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은, 이 세계에 아직 없는 행복을 향해서 직진하는 다코타 패닝의 로드 무비다. 다코타 패닝이 연기한 웬디는 자폐증후군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재활시설에서 지낸다. 말하자면 웬디는 지구에 불시착했다. 그녀는 지구인과 다르다. 샌프란시스코의 재활시설에서 구조요청을 하며 구조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웬디가 이곳을 떠나 독립해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웬디는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정해진 몇 가지 규칙들을 지키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숙소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 외의 경계인 마켓 스트리트를 절대 건너지 않는 것. 더 있다. 웬디는 글도 마음껏 쓸 수 없고 TV도 마음껏 볼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웬디의 균형 잡힌 삶을 위한 규칙이다. 웬디의 일상은 통제로 가득 차 있다.

웬디는 스타트렉의 광팬이다. 팬에서 더 나아가 스타트렉의 시나리오 공모전을 위해 400쪽이 넘는 대본을 썼다. 이 공모에 당선되면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웬디에게 재활 훈련을 하는 것은 조카를 만나고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 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한 준비였다. 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보호자인 언니 오드리는 웬디를 받아 줄 생각이 없다. 언니는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서 웬디를 버린다. 실망한 웬디는 대본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한을 놓치고 만다. 희망은 좌절되고 망쳐졌지만, 웬디는 이것을 극복하기로 마음먹는다. 웬디는 스타트렉 공모용 대본을 부치는 대신 직접 가지고 LA의 파라마운트사로 가기로 한다.

그렇게 웬디의 여행이 시작된다. 웬디는 우여곡절 끝에 LA행 버스를 타지만 차 안에서 오줌을 싼 강아지 피트 덕에 도로로 방출된다. 본격적인 탈주의 시작인 셈이다.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웬디의 과거와 주변부를 암시한다. 조카뻘의 아이 엄마는 언니인 오드리로, 웬디를 보호해 병원으로 데려가는 흑인 할머니는 보호자인 스코티와 겹쳐진다. 웬디의 주변 상황과 환경을 흑백, 선악 논리로부터 벗어나 보다 풍부한 시각으로 보게 한다. 그러니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웬디의 핸디캡은 지워지고 한 인물의 성장서사가 드러난다.

길에서 이어지는 웬디의 고난은 사실 암울하다기보다는 유쾌하다. 웬디에겐 목적지가 있다. 이 목적지는 분명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곳이다. 웬디가 처음 만난 아기 엄마는 웬디의 지갑 속 현금을 훔친다. 웬디는 이들과 LA까지 동행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버려진다. 하지만 웬디는 크게 좌절해 주저앉지 않고 다시 LA를 향해 걷는다. 웬디는 가는 길에 대본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웬디에게 이 대본은 자신을 구하러 오기로 한 엔터프라이즈 호였다.

자신을 구조하러 올 비행선의 상실, 이럴 때 실종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탈출은 불가능하다. 웬디는 규격에 맞게 인쇄된 대본을 3월 16일 오후 5시까지 제출할 수 있을까? 웬디는 포기하는 대신 잠시 대기하며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웬디는 남아있는 대본을 꺼내 읽는다. 스팍이 말한다.
“캡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전진뿐입니다.”

‘스탠바이, 웬디’는 영화 자체의 이야기를 포함해 세 가지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SF 시리즈 ‘스타트렉’이고 다른 하나는 ‘피터팬’이다. 불시착한 우주인 웬디는 전진을 결심한다. 내일이면 어른이 되는 피터팬의 ‘웬디’는 네버랜드에 남는 대신 어른이 되기로 한다. 어떤 내일로 갈 것인지에 대한 스토리(시나리오)는 스스로 창작했다. 좌절했다는 것은 가고자 한 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대가, 어린 세대가 세상에 나가 좌절을 겪는 것은 어쩌면 희망이고 다행인 일이다. 희망은 배달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 작품이 사랑스러운 금발 소녀의 해프닝을 다루는 영화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에 나오는 많은 여성 인물들은 명확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화려하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보다는 직업과 연결된 유니폼을 입고 있다. 이 영화는 어쩌면 핸디캡이 있는 여자 주인공의 로드 무비, 어쩌면 불시착한 누군가가 구조를 기다리다가 자활을 시도하는 영웅 서사의 스핀오프일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갇힌 세계, 높은 유리벽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청춘들에게 보내는 신호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별에 불시착한 많은 ‘웬디’들에게 전진을 명령하는 ‘스텐바이, 웬디’를 추천한다.

정지혜(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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