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
공개날짜: 2월 15일(월) 오후 2시
공개장소: CGV 왕십리
감독: 라즐로 네메스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개봉: 2월 25일

줄거리: 수많은 주검 속에서 아들을 발견한 사울(게자 뢰리히)은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고자 한다. 다만 그들은 유대인이었고, 포로였고, 애석하게도 그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리뷰: 영화 ‘사울의 아들’을 만나고 며칠간 지하철 플랫폼에서, 길거리 모퉁이에서, 자주 가던 커피숍에서 사울의 어린 아들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아직까지도 이승에 남아 저토록 애달프게 배회하는 것일까…‘사울의 아들’은 그 여운과 인상이 꽤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작품이다.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시신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반을 부르는 말로, 영화는 존더코만도인 사울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울의 심정을 헤아리려면 존더코만도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인도하고, 그 시체를 강에 버리고, 시체의 이빨에서 금을 빼내는 일 등을 행한 존더코만도 대부분이 같은 유대인이었다는 비극적 사실을 말이다.

여기에서 존더코만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잠시 엇갈릴 수 있다. 그들은 학살에 협조한 악마인가. 동족들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인가. 영화는, 그리고 역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죽음을 잠시 유예했을 뿐, 후임으로 오는 존더코만도들에 의해 역시 가스실로 보내질 운명을 짊어진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치가 자신들이 해야 할 악행을, 편의를 위해 떠넘긴 것이 바로 존더코만도. 광기의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의 존재들인 셈이다.

동족을 시체를 처리하는 이들의 눈길은 어찌 이리도 바짝 메마른 먹빛이란 말인가.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낼 수 있을까, 살아 있는 것이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내내 자문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인간이길 거부당한 잔인한 현실 속에서 기계 부품처럼 일하는 사울에게 희망은 요원하다.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꾸역꾸역 버텨나갈 뿐이다. 그 어떤 의욕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드라마’라는 게 성립될까. 무엇이 사울을 그토록 뜨겁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아들의 주검이다. 시신을 처리하던 사울은 어느 날 죽어가는 한 소년을 보게 되는데, 그 소년이 아들이라는 것에서 사울의 애절한 여정은 시작된다. 아들만큼은 유대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던 사울은 결국 시신을 빼돌리고, 죽은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해줄 랍비를 찾기 시작한다.

그의 이러한 위험천만한 행동은 종종 동료들을 위험으로 이끈다는데 ‘사울의 아들’은 또 한 번의 질문을 던진다. 부조리한 광기의 지옥에 놓인 인간이 선택한 저 부조리한 대응 방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울은 왜 이토록 아들의 장례에 집착하는가.

사울의 아들2
사울의 아들2

(이 문장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후반부, 사울의 아들이 실은 사울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슬그머니 내밀며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강화한다. “사울, 너에겐 아들이 없잖아”라고 묻는 동료에게 사울이 말한다. “아니야. 있어. 본처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주어와 사울의 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아들이야’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 사울의 행동들은 보다 풍부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어쩌면 죽은 시체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사울이 선택한 구원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 뿐 아니라, 존더코만도 동료들을 구원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은 이데올로기의 벡터’라는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주장을 잠시 빌리면 ‘사울의 아들’의 형식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로 기능한다. ‘사울의 아들’을 보다 특별한 영화로 만드는 것은 끈적끈적하게 필름에 들러붙어 있는 카메라 기술이다. 주인공 사울의 클로즈업숏과 시점숏으로만 무장한 영화에서 그의 시점에서 벗어나 있는 죽어가는 시체들은 모두 포커스아웃 돼 있는데, 흐릿한 화면이 그 안에 숨겨진 참혹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하니 보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혔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숨긴 카메라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운드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이 영화의 형식이 훌륭한 것은 비단 기술적 성취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러한 대비를 통해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진실에 내밀하게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들’은 무수히 존재하는 홀로고스트 영화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두르고 있는 수작이다. 실제 아우슈비츠 피해자 집안 출신인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그간 생존을 다루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주를 이루는 홀로코스트 영화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비극적이고 참혹한 과거를 신화로써 재생산하려는 시도에 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사울의 아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바를 드러냈다.

라즐로 네메스에게 ‘사울의 아들’은 장편 데뷔작이다. 이 감독은 앞으로 자신의 데뷔작과 평생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짊어졌다. 나쁘지 않은 운명이리라, 생각해본다.

관람지수: 10점 만점에 9점

TEN COMMENTS, 이 영화가 다루는 비극에는 타협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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