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페셜>, 제로와 24개의 이야기가 남긴 것
, 제로와 24개의 이야기가 남긴 것" /> ‘피아니스트’ 토 KBS2 밤 10시 55분
실력도 재력이 없으면 꽃 피울 수 없고, 사랑도 가난하면 비굴해 질 수밖에 없다. 학생으로부터 실력을 입증하려면 쇼팽을 쳐 보라고 강요당하는 기간제 교사 인사(한지혜)에게 꿈은 좌절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꿈을 꿔본 적 없는 스물한 살 제로(최민호)에겐 이 모든 좌절이 낯설다. 꿈이 뭐냐는 인사의 질문에 생각 안 해봤다 답하는 그는 아직 열망하는 것이 없다. 순수한 천재와 그 재능을 알아 본 여인의 사랑으로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면 참 좋겠지만,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피아니스트’의 미덕은 섣부른 낙관으로 달려가지 않고, 현실을 덤덤하게 그려내는 것에 있다. 제로는 재능이 세월에 닳아가는 참담함도, 가난한 사랑의 비굴함도 겪은 적이 없기에 인사의 열패감도, 인사가 자신을 떠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다 잘못 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열린 결말로 끝을 맺긴 했지만, ‘피아니스트’는 현실의 무게를 외면하는 우를 범하지 않은 덕에 판타지가 아닌 진심을 담아낼 수 있었다. 제로는 연미복을 입었지만 여전히 공장에 다니고, 슈퍼마켓에서 만난 두 사람 역시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덤덤한 결말 앞에서 시청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현실 안에서 가능한 수준의 미래를 희망하는 것뿐이다. 24회를 달려온 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의 24개의 에피소드는 수작만큼이나 비슷한 수의 범작을 포함하고 있고, 누군가는 그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 지금의 방송 제작 현실 속에서 단막극의 가치가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발을 뗐다. 단막극의 미래에 대해 마냥 낙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빡빡한 제작 환경에 지치지 않고 완주해 준 제작진 덕분에, 우린 시장의 흐름 속에서 가능한 형태의 단막극의 미래를 희망해 볼 수 있다. 24개의 이야기가 남긴, 섣부른 낙관이 아닌 진심 어린 희망이다.

글. 이승한 four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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