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봉준호 감독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국의 기자가 뒷방에 수정구슬이 있냐고 하더군요. '뭔 소리지?' 했더니, 마녀나 주술사, 예언자가 수정구슬을 사용하잖아요. 하하."

영화 '미키17'을 앞두고 만난 봉준호 감독은 외신 반응을 전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기획됐지만 현 세태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본 듯해 '기막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통찰력 덕분에 봉 감독은 외신들에게 '예언자'라는 얘기까지 듣는다.

가까운 미래가 배경인 '미키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돼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소모품) 미키의 이야기를 그리는 SF다. 영화 속 '행성 개척단'은 미키17이 죽은 줄 알고 미키18을 프린트하는데, 사실 미키17은 죽지 않은 상태였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이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번 작품은 봉 감독이 '기생충' 이후 내놓은 6년 만의 신작이자 할리우드와 협업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배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토니 콜렛, 그리고 마크 러팔로가 출연한다.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는 2022년 8월부터 12월까지 촬영됐다. 봉 감독이 몇 년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지만 공교롭게도 현재 전 세계적 정치·사회 상황을 연상시키는 듯한 장면이 많다. 독재, 정쟁, 인간성 상실, 환경 파괴 등의 문제가 은유적으로 녹아있다. 봉 감독은 "202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2022년에 촬영했다. 2023년에 크리퍼(극 중 크리처 이름)와 같은 컴퓨터 그래픽들을 만들었다. 스토리보드에는 2022년 초부터 다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홍보 일정을 소화 중인 봉 감독은 "이탈리아의 한 여자 기자는 마셜이 무솔리니를 모델로 한 거 아니냐고 했다"며 "미국 기자는 현재 자신이 겪는 정치 스트레스를 마셜에 투사한 것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도 한국의 상황이 있는데, 2022년도에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극 중 총알이 마셜의 얼굴을 스치고 가는 장면이 있다. 마치 미국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가 귀에 경미한 총상을 입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봉 감독은 "근래에 다른 작업 때문에 뉴욕에 갔다가 마크 러팔로를 만났는데, 둘이서 신기하다고 얘기하며 웃었다"고 전했다.

관객들 사이에서 마셜(Marshall)이라는 이름이 계엄의 영어 단어 '마셜 로(Martial law)'와 발음이 비슷해 흥미롭다는 반응도 나온다. 봉 감독은 "마셜이라는 이름은 원작 소설에 이미 나와 있고 2021년 9월에 완성한 시나리오다. 타임테이블에 전혀 혼동이 없다"고 재차 강조해 웃음을 안겼다.
'미키17' 포스터.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미키17' 포스터.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에는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가 등장한다. 베이비 크리퍼, 주니어 크리퍼, 그리고 무리의 대장 격인 마마 크리퍼가 있다. 크리퍼는 거대한 콩벌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영화 '괴물'의 괴물을 떠올리게도 한다. 디자인의 출발점은 크로와상이었다고.

봉 감독이 크리퍼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크리퍼 집단과 대비되는 비열한 인간 사회의 모습이다. 행성 개척단이라는 인간 사회는 집단을 위해 죽는 일을 하는 한 사람 미키에게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크리퍼는 하나의 희생마저도 경시하지 않는다. 봉 감독은 "마셜이 추악하고 찌질한 독재자라면 마마 크리퍼는 멋진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엄도 있고 위트도 있다. 마셜이 최악의 리더라면 마마 크리퍼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매력 있는 리더"라고 말했다. 이어 "동물이나 크리처를 영화에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지 돌아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고 짚었다.

봉 감독은 자신의 필모그래피 처음으로 '러브 스토리'를 담기도 했다. 그는 "돌이켜보니 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가혹하게 대한 편이더라. 현실의 쓰라린 모습을 풍자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 한복판에 놓인 주인공이 가혹한 상황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반성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이번에도 미키를 둘러싼 상황은 가혹하다. 심지어 죽는 게 직업이니까. 그럼에도 극복하고 파괴되지 않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파괴되지 않게끔 해준 게 나샤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미키 역의 로버트 패틴슨과 나샤 역의 나오미 애키에 대해 봉 감독은 "남녀 주인공으로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것, 저한텐 중요한 지점이었다"며 "기본적으로는 SF지만 영화의 일부가 된 멜로도 중요했다"고 전했다.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미키17' 스틸.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기생충'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봉 감독. 세계를 제패했지 않았냐는 이야기에 "그 표현은 민망하다"라며 웃었다.

봉 감독은 "저는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계속 기억되고 싶다. 어떤 조건에서도 끊임없이 이상한 톤을 유지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키17'도 따뜻하고 밝은 영화지만 동시에 이상한 구석도 많다. 나의 '행보'라는 건 보는 분들이 정리해줄 요소 같다. 지금도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2019년 '기생충' 개봉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전작의 결과에 따라 차기작을 준비하는 게 아닌 현재 작품이 개봉하기 전부터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미키17'은 10번째이고 다음은 애니메이션이다. 이걸 유지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거장'으로 꼽히는 여러 영화 감독은 최근 시리즈물에 도전하고 있다. 봉 감독은 시리즈 연출 생각이 없을까. 그는 "해보고 싶은데 제 작업 스타일과 맞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제가 평소 찍던 속도의 2배는 나와야 한다"고 털어놨다. 이어 "시리즈 제안은 많이 받았다. 에이전트들이 특히 좋아한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에이전트도 '넌 왜 시리즈를 안 하냐"고 한다. '난 잘릴 것 같다'고 하면 '너한테는 회차를 많이 줄 수도 있다'더라. 전 자신이 없다"며 웃었다.

원작이 먼 미래였던 것과 달리 봉 감독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2054년인 근미래로 설정한 건 '현실감' 때문이었다. "2054년이면 85살이다. 아직 안 죽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너스레를 떤 봉 감독. 실제 2054년엔 뭘 하고 있을 것 같냐는 물음에 "기계 몸이 된 채로 계속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184번째 영화까지"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미키17'은 국내에서는 오는 28일, 북미에서는 다음 달 7일 개봉한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ADVERTISEMENT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