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아일릿/사진제공=빌리프랩
그룹 아일릿/사진제공=빌리프랩
아이돌 그룹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만들어 음악 뿐 아니라 아이돌의 가치관까지 상품화했던 K팝 소속사들이 세계관 마케팅 전략을 점차 내려놓고 있다.

하이브 산하 레이블 빌리프랩의 신인 여자 아이돌 그룹 아일릿(ILLIT)이 지난 4일 브랜드 필름을 공개했다. 브랜드 필름 공개에 앞서 아일릿의 세계관에 대한 여러 추측이 존재했다. 빌리프랩 소속 선배 아이돌 그룹인 엔하이픈(ENHYPEN)의 팬들이 후배 그룹 아일릿에 대해 엔하이픈의 세계관과 연결된 세계관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던 바. 그러나 이날 공개된 브랜드 필름에서는 기존 엔하이픈의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평범한 학생의 수업 중 공상이 주제로 등장했다.
그룹 엔하이픈/사진=텐아시아DB
그룹 엔하이픈/사진=텐아시아DB
이와 관련 하이브 관계자는 아일릿의 세계관에 대해 "엔하이픈과 연결되는 세계관은 별도로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그는 "독자적인 아일릿만의 명확한 콘셉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계자는 "아일릿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추후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아일릿만의 콘셉트'가 있음을 시사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광야'로 대표되는 아이돌 세계관은 '4세대 아이돌' 사이 대세로 통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세계관을 앞세운 전략이 더 이상 팬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데다가, 세계관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에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때문에 요즘 아이돌은 특정한 세계관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 청량함을 콘셉트로 내세우며 인기몰이중인 SM엔터의 보이그룹 라이즈(RIIZE)와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의 투어스(TWS)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이브 역시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엔하이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르세라핌 등 네이버 웹툰과 연계하여 세계관을 형성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세계관을 활용하고 있는 그룹은 엔하이픈 뿐이다. 세계관의 활용도가 낮아진 데에 관해 하이브 관계자는 "세계관을 강조하기보다 팀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그룹마다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고 답했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는 이에 관해 "극단적인 세계관으로 대중이 피로감을 느낀 데에 대한 시대적 반응으로 개별 그룹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세계관에서 개별 성장 서사에 집중하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세계관은 붕괴했을 때의 리스크가 크다. 에스파(aespa)의 리더 카리나와 이재욱의 열애가 공식화되면서 다른 그룹에 비해 에스파 그룹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이유도 세계관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실 속 카리나는 광야의 카리나와 동일시됐기 때문에 카리나의 연애는 세계관 자체의 붕괴를 야기했다. 세계관을 통해 그룹을 소비하게 된 팬층 이탈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아일릿을 비롯해 5세대 아이돌로 등장한 라이즈, 투어스는 세계관보다는 그룹 자체의 서사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룹 라이즈/사진제공=SM
그룹 라이즈/사진제공=SM
청량한 이미지의 대표 주자 격인 라이즈는 SM의 '광야'를 벗어나 '이모셔널 팝'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갖고 있다. '감성적인 팝'이라 하여 라이즈의 '러브119'(Love119)과 같은 서정적인 음악의 한 장르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라이즈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음악에 담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이에 대해 SM 관계자는 "라이즈는 세계관보다 '이모셔널 팝'(Emotional Pop)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우는 그룹"이라며 "그룹만의 성장사를 강조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세계관에 대한 언급은 없이 멤버 개개인의 성장과 그룹 색을 뚜렷한 독자 장르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룹 투어스/사진=텐아시아DB
그룹 투어스/사진=텐아시아DB
또 다른 청량 아이돌로는 하이브 산하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투어스를 꼽을 수 있다. 투어스는 '보이후드 팝'(Boyhood Pop)을 독자적 장르로 내세우고 있다. '소년 시절'을 뜻하는 '보이후드'를 붙인 만큼 청량한 소년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들은 "일상에서 아름다운 감상을 불러일으키겠다"며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을 선보이려는 의지다.

김도헌 평론가는 세계관이 비추는 시선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봤다. 그는 "세계관은 없어질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K팝은 음악과 함께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산업이다. 그걸 하나로 엮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세계관이다. 다만 그룹 사이의 큰 세계관에서 그룹 개별의 것으로 시선이 틀어진 것"라고 전했다.

이민경 텐아시아 기자 2min_ror@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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