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에서 가족으로 변화
무엇이 극한의 공포를 만드는가
"새로운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 봉준호 극찬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영화 '잠'과 관련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구성하는 한자는 家族(집 가, 겨례 족)을 사용한다. 풀어서 부부(夫婦)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家庭)을 이루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의 탄생은 부부에서 가족으로 확장되는 일상의 변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우렁찬 소리를 내뿜는 아이의 존재는 이전과는 다른 균열을 가져온다.

영화 '잠'(감독 유재선)은 틀림없이 소리의 영화다. 오프닝의 블랙 화면 너머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가 가득 채워져 있다. 적막한 공간에 울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은 잠든 수진(정유미)의 얼굴이다. "누가 들어왔어"라는 남편 현수(이선균)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침입자가 존재를 인식하고 경고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결에 내뱉은 현수의 말은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공포로 뒤바뀐다. 만삭의 임산부인 수진은 잠든 현수를 깨우지만, 미동조차 없다. 아래층에서는 새벽마다 소음이 들린다며 민원을 넣으면서 원인 모를 소리의 공포는 점차 실체를 드러낸다.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임산부 수진에게 수면 중 이상행동을 보이는 현수의 행동은 '지켜내야만 한다'는 강한 명령어를 입력시킨다. 벌레가 기어 다닌 것처럼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대거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마구 먹어대는 현수의 모습은 아무런 전조증상조차 없던 상황이다. 몸 내부에 지켜야 할 아이를 품고 있는 수진은 집 안 내부를 작은 감옥처럼 만든다. 임신 초기가 아닌 출산 직전인 수진의 상황은 집 안 내부에 있는 침입자인 남편을 더욱 경계하도록 한다. 더욱이 부부의 사생활이자 안락한 안방의 침대 밑에는 붉은색 피가 흩뿌려있다. 기존의 의미가 퇴색된 침실에서 수진은 자꾸만 잠들지 못하고 예민해진 정신 탓에 남편에게 증오를 토해낸다.

3개의 장으로 구성된 '잠'은 '수면장애'라는 일상의 흔한 병으로부터 기인한 위협으로 인해 결속력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포착한다. 병원에서 수면장애를 진단받은 현수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발생하는 이상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부부의 반려견이던 강아지 후추마저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자, 부부는 같은 공간에서 분리되기에 이른다. 안방에서 거실로 화장실 안까지. 기존의 공간이 가진 목적이 바뀌고 침실은 이제 부부의 공간이 되어줄 수 없다.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표면적으로 '잠'은 남편 현수의 잠들면 시작되는 이상행동이 모든 문제의 근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수는 해당 사항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어렵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하거나 아내 수진과 아이를 위협하는 행동은 현수에게 있어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지만, 수진에게는 현재진행형으로 찾아드는 위협이다. 역할 수행에 있어 현수는 듬직한 남편이 될 수도 아이를 지키는 아버지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늘 세상모르고 잠들고 깨어난 이후에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진의 얼굴을 목격할 뿐이다. 어쩌면 책임감으로부터 회피하는 밉상 남편처럼 그려질 수도 있지만, '잠'은 현수를 방관자로만 비추지는 않는다.

수진과 현수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가진 인물이다. 배우를 꿈꾸는 현수는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음에 불안감을 드러낸다. 종종 비치는 현수의 상황은 짧게 나오는 분량임에도 밤 촬영을 가야하고 하물며 균열의 시작이 된 "누가 들어왔어"라는 말은 현수가 외우던 대사였다. 이는 부부에서 가족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애써 부정하는 현수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일 수도 있다. 단역 배우인 현수를 응원해주던 믿음직스러운 모습 대신 수진은 피골이 상접하고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몰골로 변해간다. '잠'은 수면장애가 시작된 원인을 부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방법을 차용한다. 이 과정에서 수진과 현수는 자꾸만 부딪히게 된다.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명패는 수진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구인데 현수는 자꾸만 결속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속되기란 만무하기 때문이다. '부부'의 믿음을 강조하던 수진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으로 광기 어린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수진에게만 기울던 지켜야 한다는 지침은 이제 현수에게로 양도된다. 정상적으로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수진의 낮은 불안정하다. 서로 낮과 밤이 뒤바뀌면서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은 꽉 닫힌 문처럼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현수의 밤을 수진이 기억한다면, 수진의 낮은 현수가 기억하는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쏟아낸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잠'의 유재선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영리하다. '봉준호 키드'라 불리는 유재선은 단계를 넘어가면서 마주친 부부의 결속을 해체하며 공포 영화의 새로운 장을 만들었다. 더욱이 정유미, 이선균이 끌고 가는 묵직한 연기 내공은 무시할 수 없는 '잠'의 핵심축이다. 사랑스러운 눈빛이 아닌 겁에 질린 표정의 정유미와 점점 옥죄어오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는 이선균은 유재선의 세계관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으며 첫 장편 데뷔작부터 '괴물' 같은 출범을 알렸다. '잠'이 보여주는 신선한 공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든 불안감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잠'으로 이름을 알린 유재선 감독의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바다.

영화 '잠' 9월 6일 개봉. 러닝타임 94분. 15세 관람가.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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