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아버지가 바깥일에 전념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결국 이혼에 이르렀고 딸은 가족을 팽개친 아버지를 향한 원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다가 극적인 계기로 화해하고 자신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그런데 같은 주제가 '테이큰'(2008) 같은 활극과 연결되면 어쩐지 '가족'이라는 게 가벼워보인다. 그런가하면 다짜고짜 엄마가 불치병에 걸리고 딸이 걱정할까 내내 자신의 병을 숨기다가 약 봉투가 우연히 딸의 눈에 띄면서 새삼 가족관계가 부각된다. 아니면 그 반대로 딸이 암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주제가 '친정엄마'(2010) 같은 최루영화와 묶이면 '가족'이라는 게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입니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우애 깊던 4남매가 크리스마스 이브 가족 모임에서의 다툼을 기점으로 각자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삶에 대한 아름다운 시선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며 소중한 이들을 되새기게 하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사실 '테이큰'이나 '친정엄마'류의 영화가 가족영화를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에 비교할 때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감독 아르노 비야르)는 매우 세련된 가족영화다. 보르고뉴 한적한 시골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나누고 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슬픔에 빠진 어머니의 생일잔치에 네 남매가 찾아온 것이다. 대형 슈퍼마켓 영업이사로 성공한 세일즈맨 장-피에르(장 폴 루브), 고등학교 교사 줄리엣(앨리스 태그리오니), 사진작가 마고(카밀 로우), 그리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막내 마티유(벤자민 라베른헤)다. 첫 장면에서 네 남매가 나누는 짧은 대화를 통해 이들의 관계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화기애애한 가족으로 장-피에르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영화의 묘미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가족 구성원들 각각의 특징을 분명하게 묘사해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 입에서, 이를테면 '아 저 양반은 꼭 우리 작은 아버지 같네!'라는 탄성이 나오면 성공한 셈이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에 그려진 인물들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나이 마흔에 여전히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줄리엣, 사진작가로 자존심이 넘쳐나지만 현실에 적응 못하는 마고, 소심한 성격 탓에 맘에 드는 여자에게 한마디 말도 못 건네는 마티유, 동생들에게 언제나 적절한 충고를 하려는 장-피에르, 하지만 충고를 언제나 쓸 데 없는 참견으로 받아들이는 동생들. 거기에 매사를 장남에 기대는 어머니까지……. 한국식 가족관계를 프랑스에서 발견한 게 나름 흥미로웠다. 아니면 세계 어디나 가족이란 비슷한 것일까. 위기가 닥쳐왔을 때 과연 그들이 어떻게 극복하는지도 중요한 볼거리다. 특히 영화 전반부에 이미 적절하게 가족 관계를 설정해 놓았기에 후반에 닥친 위기는 더욱 애처로웠다. 만일 20년 전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됐다면 "관객 분들은 손수건을 꼭 준비하세요"라는 선전문구가 붙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관객들 중 몇몇은 영화를 보고 뜨악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아직도 이렇게 감성 팔이 영화를 만드나? 물론 여기저기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섭렵한 약은 관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관계 설정이 매우 뛰어난 덕분에 필자는 오랜만에 영화가 내비치는 감성(!)에 푹 젖어들었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가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라는 사실은 세밀한 심리 묘사와 엉뚱한 유머감각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겉보기와 다르게 섬세한 장-피에르는 옛 애인 헬레나(엘자 질버스테인)의 전화 한통에 흔들리고, 엄청난 기대와 확실한 절망 사이에서 줄리엣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끔찍한 비극에 노출된 마고는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마티유의 고민은 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연극배우 헬레나의 독백은 아주 멋있었다. 거기에 더해 관객의 허를 찌르는 급격한 반전은 가히 일품이었다. 감독이 관객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전체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줬는데 그 때문에 지루한 줄 몰랐다.
장남으로 나온 장 폴 루브는 '라 파미에'(2018), '세라비, 그것이 인생'(2017)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라 파미에'는 그의 감독작이기도 하다. 가족영화에 일가견을 가진 배우임이 분명하다. 어린 시절 종종 들었던 말 중에 "서양은 개인주의가 발전해 가족마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더라"가 있다. 당시는 서구문화에 대한 일종의 동경심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그쪽 경향이라면 무조건 귀 기울여 듣던 때였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특히 프랑스 영화들도 주로 인간의 소외라든가 삶의 모순 등에 집중했던 터라 가족의 애틋한 정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 드물었다. 그런데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를 보면서 프랑스 영화계의 요즘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 역시 그러하다.
가족의 가치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데 아마 각박해져가는 세상에서 어디인가 맘 둘 곳이 필요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느 나라건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영화들이 수두룩하지만 정작 맘에 쏙 드는 작품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제법 깊은 생각을 담고 있다.
안나 가발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프랑스의 유명 잡지 피가로는 "첫 번째 작품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놀라운 소설집"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체도 뛰어나다고 하는데 영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커피와 쿠키를 옆에 준비해두고 편안한 맘으로 즐기시기 바란다.
가족은 우리에게 확실한 위로를 준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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