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무환(無患) : 영화를 보면 근심이 없음을 뜻한다
[무비무환] 핫팩, 라떼 같은 로맨스 영화
포근한 담요를 뒤집어 쓰고 보기에 딱 알맞은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그리워지는 때가 왔다. 따끈한 핫팩 같고, 달달한 라떼 같으면서도 때로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한국 로맨스 영화 7편(청불제외)을 소개한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 포스터
영화 '질투는 나의 힘' 포스터
질투는 나의 힘
박찬옥 감독, 2003년

우리 주변의 누군가와는 조금씩은 닮아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자아내는 생활 다큐 같은 느낌의 영화. 위선적인 듯하지만 때로는 따뜻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문학잡지 편집장인 유부남 한윤식(문성근). 문학을 좋아하지만, 남은 인생의 최대 흥미는 로맨스라며 폭넓은 스펙트럼의 여성 편력이 있는 그의 한마디. "바람도 못피고 마누라한테도 못하는 놈보다 백 번 낫다" 그런 윤식에게 애인과 연상의 사진작가 박성연(배종옥)까지 두 번이나 여자를 빼앗긴 부하 직원 이원상(박해일). 얼굴 표정에서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원상은 윤식에게 이중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질투와 함께 그에게서 묘한 호기심을 느낀다. "누나, 편집장님이랑 자지 마요. 꼭 누구랑 자야 된다면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 그랬던 원상은 "(편집장님과는) 어차피 게임이 안 돼요. 난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어요. 난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이별을 통보한다. 그러곤 윤식의 집으로 들어가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원상의 질투의 끈은 언젠가 한번 일을 낼 것 같다. 윤식의 고등학생 딸에게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잘해보자"라는 말에서. 남자 심리를 이렇게 세심하게 표현해내는 여성 감독 박찬옥의 연출 역량에 탄복하게 된다. 제목 '질투는 나의 힘'은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중 유명한 한 편.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멋진 하루'. 포스터
'멋진 하루'. 포스터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2008년

무슨 로맨스 영화가 베드신, 키스, 포옹은 커녕 손 한번 잡는 일도 없다. 이렇다할 임팩트 있는 장면도 없이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지만 또 보고 싶게 하는 중독성이 있다. 대책 없는 찌질남,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 병운(하정우)에게 1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 희수(전도연)가 빌려준 돈 350만원을 갚으라며 찾아온다. 우리 주변에 꼭 있을 법한 캐릭터와 있을 법하지 않는 스토리간의 묘한 조합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병운은 희수와 하루를 같이 다니며 평소 알고 지내는 여성 사업가, 술집 아가씨, 스키강습 제자였던 주차단속 요원, 초등학교 동창 이혼녀 마트 캐셔, 은근슬쩍 자신을 무시하는 사촌형까지 찾아가 100만원, 70만원, 40만원, 10만원 등을 빌려 그 돈을 모두 갚는다. 하지만 희수가 사정이 딱한 이혼녀 마트 캐셔가 건네는 40만원중 절반만 받고 견인 및 과태료 8만2100원, 꽃값과 기름값 각 3만원씩 등 34만2100원에 대해 병운으로부터 다시 차용증을 받는다. 병운은 '빚쟁이'가 찾아 왔건만 하루종일 싱글벙글 좋기만 하다. "나랑 있을 때보다 헤어질 때 더 행복해 보이는 네 표정이 안 잊혀졌어. 그래서 아팠다"고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응어리도 너스레식으로 풀어 놓는다. 희수는 지하철역에 병운을 내려주고 가다가는, 갑자기 유턴을 해서 병운이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곤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향한다. 희수는 언젠가 34만원짜리 차용증을 들고 병운을 다시 찾아갈 것 같다. 괜찮은 여자가 있다면 돈을 꾸고 갚지 마라. 인연의 불씨를 살려 두기 위해. 채권-채무 관계가 만들어 낸 멋진하루다. 전도연이 있었기에 하정우의 능청맞은 연기가 더 빛났던 영화다.
'아는 여자' 포스터,/
'아는 여자' 포스터,/
아는 여자
장진 감독, 2004년

시한부 인생 남자와 바텐더 여자, 왠지 가슴 짠하게 진행될 것만 같은 구조이지만 시종일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후반부 한 장면은 한국 ‘로코’의 최고 명장면중 하나로 꼽고 싶다. 프로야구 2군 선수 동치성(정재영)은 애인에게 차인 뒤 병원에서 3개월 시한부
판정까지 받는다. 앞이 깜깜해진 치성은 단골 술집을 찾아 인사불성으로 취하고, 그런 그를 바텐더(이나영)가 업고 모텔로 데려와 재워준다. 둘 사이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다음날 치성은 버스안 라디오에서 어젯밤 자신의 이야기가 청취자 사연으로 소개되는 것을 듣게 된다. 그 바텐더는 치성을 오래전부터 사랑해 오고 있었고, 사연 제보는 핸드폰을 상품으로 받아 치성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했다. 다섯군데 라디오 방송에 보냈는데 모두 채택된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코미디같은 상황이다. 치성은 은행에서 무장강도 난입에 휘말렸다가 그들을 검거하는데 일조하기도 하고, 반대로 동네 좀도둑에 온정을 베풀었다가 장물애비로 몰려 경찰조사까지 받는다. 그런데 모든 스토리는 하나같이 사랑 얘기로 귀착된다. 무장강도도 TV인터뷰에서 사랑 얘
기를 하고, 좀도둑도 그렇다. 야구 감독, 코치, 형사반장까지도. 치성은 경찰을 피해 바텐더집에 얹혀살 때가 있다. 야구룰을 모르는 그녀는 땅볼을 잡아 1루에 던지지 않고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무척 궁금하다고 한다. 감독이 테스트 삼아 치성을 주전투수로 내세웠는데, 기대밖의 호투로 9회말 투아웃 생애 첫 완투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지막 타자가 친 공은 투수 앞 땅볼, 치성은 그때 바텐더의 얘기가 떠올랐고 망설임 끝에 결국 관중석으로 공을 던지고 만다. 아웃 카운트가 아니라 사랑을 잡기 위해 볼을 던진 치성. 덕아웃
과 홈팬 관중들은 모두 난리가 났지만, 치성은 인생 최고의 마구를 던졌다. 치성의 3개월 시한부 판정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의사의 오진으로 판명나고, 그뒤 바텐더와 연애가 시작된다. 그때까지 '아는 여자' 였던 그녀의 이름도 그제서야 물어본다. 이연. 나이가? 취미가? 좋아하는 음식은? 혈액형이? 그때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도 못해봤던 치성에게 드디어 '첫사랑'이 생겼고, 오진으로 시한부의 절망에서 벗어난 그에겐 '내년'도 생겼다. '코파지마'라는 구질구질한 얘기가 이렇게 애절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싶다. 실컫 웃고 훈훈한 마음으로 자리를 뜰 수 있다. 장진 감독의 번뜩이는 기지와 정재영·이나영 케미에 박수가 터진다. 영화를 본 뒤론 데이라이트의 '아는여자'도 이따금씩 듣게 된다.
'시라노 연애 조작단'. 포스터./
'시라노 연애 조작단'. 포스터./
시라노 연애조작단
김현석 감독, 2010년

연애조작단은 느낌이 딱 오는 말이지만 시라노는? <시라노 드 벨쥬락>이라는 1890년대프랑스 희곡의 주인공 이름이다. 유난히 큰 코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를 위해 대필하는 편지 속에 마음을 담아야했던 시라노의 낭만적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연애편지 대필이라고 하니 <클래식>의 준하(조승우)나 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떠오른다. 연애를 어떻게 이끌어가야할지 모르는 쑥맥 의뢰인들을 위해 설정 세팅, 밀당, 어필 포인트 등 고도의 연애 스킬을 제공해 짝을 이뤄주게 하는 연애 컨설팅 사업 조직 시라노 연애조작단. 예상대로 웃음이 빵빵 터지는 쾌활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웃음만 있는 공허한 영화는 아니다. 의뢰인의 상대가 연애조작단장의 옛 애인이거나, 조작단 내부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애틋한 삼각관계 같은 감성 포인트도 있다. 기발한 소재와 출연진의 탄탄한 연기력이 영화의 힘이다. 특히 주연은 아니었지만 송새벽과 박신혜의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그네스 발차의 <우리에게도 더 좋은 날이 오겠지(Aspri Mera Ke Ya Mas)>와 엔딩송 박신혜·이민정의 <당신이었군요>도 영화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ost다.
[무비무환] 핫팩, 라떼 같은 로맨스 영화
백자 영화평

러브 픽션
전계수 감독,
2012년

하정우, 공효진 명콤비의 웃음 만발 로맨틱 코미디. <아는 여자>와 비슷하게 남자 주인공의 독백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찰지다. 첫 잠자리에서 희진의 무성한 겨드랑이 털에 당황한 주월(하정우). 자칫 판이 깨질 위기를 최대한의 오버로 넘기는 그의 너
스레. “내가 얼마나 털을 좋아하는데. 모자도 털모자만 쓰고, 남들이 나보고 다 털털하다고 하고, 만두도 털보 만두만 먹어. 우리집 TV도 디지털이잖아.” 그러나 주월은 자신이 희진의 31번째 남자임을 알게 되고, 둘 사이는 틀어진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못잊은 주월은 희진이 떠난 알라스카를 찾고… 희진의 샤워 장면에서 나오는 베토벤의 환희중 <합창>이 이렇게 흥분을 자아내는 음악일 줄이야

나의 결혼 원정기
황병국 감독, 2005년

올해 38세, 경북 예촌의 깡촌 숫총각 홍만택(정재영). 그의 말대로 때때로, 아니 종종 몽정을 하는 그가 할아버지의 성화에 떠밀려 우즈베키스탄으로 신부감 구하기 원정을 떠난다. 알선업체는 성공 보수를 위해 이런저런 현지 여성을 계속 소개해 주지만 정작 그가 끌리는 사람은 탈북자 출신의 통역(수애). 만택이 집에서 기르는 개 이름도, 그가 술 한잔 거하게 하면 부르는 애창곡도 나훈아의 18세○○, 나중에 알게 된 그녀의 본명도 같은 이름이다. 탈북자 단속령에 그녀와 이별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만택의 공항에서의 절규. 다시 만나자는 뜻의 우즈베키스탄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경상도 사투리 ‘다 자빠뜨려’를 미친 듯이 부르짖는 대목에서 결국 눈물샘이 터지고 만다. 결론은 물론 해피엔딩. 뻔한 결말이더라도 훈훈하고 따뜻한게 좋다. 농촌 총각보다 더 농촌 총각같은 정재영의 구수한 사투리와 순수함이 기억에 남는다.

내 아내의 모든 것
민규동 감독, 2012년

어느 부부에게도 찾아오기 마련인 권태기를 소재로 한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 임수정, 이선균, 류승룡, 기막힌 캐스팅이다. 남들이 보기엔 완벽한 아내 연정인(임수정). 매력적인 외모에 요리 실력, 그리고 섹시하기까지. 그러나 그녀는 언젠부턴가 입만 열면 불평을 쏟아내는 '독설 마녀'로 변해 있었다. '갑갑하고 짜증나고 지겨워진' 아내와 매일 이혼을 꿈꾸는 남편 이두현(이선균). 그러나 소심한 그는 아내가 무서워 이혼의 '이'자도 꺼내지 못한다. 그러던 중, 옆집에 사는 이름도 야릇한 천하의 카사노바 ‘장성기’(류승룡)를 보고 드디어 아내와 헤어질 방법이 떠올랐다. 아내가 자신을 떠나게 만드는 것. 두현은 성기에게 간청한다. "제발 제 아내를 유혹해 주세요" 성기의 작업에 연정은 서서히 넘어가고 드디어 그에 대한 꿈조차 꾼다. 그러자 성기에게 애걸복걸했던 두현은 서서히 질투심이 발동하기 시작하는데…임수정은 다른 배우에 비해 출연료를 두 배는 받았어야 했다. 아마 한국영화중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 였을 듯하다.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촬영지 강릉을 찾았다고 한다.


글. 윤필영
주말 OTT 뽀개기가 취미인 보통 직장인.
국내 한 대기업의 영화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각으로 영화 이야기를 전해 준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