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페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2년전 지강헌 사건 재조명
장성규·장도연·장항준, 각자 해석한 지강헌 소개
/사진=SBS 스페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사진=SBS 스페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지강헌 사건'이 방송인 장성규, 장도연과 장항준 감독의 재해석으로 시청자들에게 소개됐다.

지난 14일 SBS스페셜 파일럿 프로젝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3부작 방송을 시작했다. 이날 장성규, 장도연, 장항준 감독은 자신이 느낀 지강헌을 온전히 '나의 시점'으로 해석해 김지혁 아나운서, 개그맨 김여운, 송은이에게 그날의 이야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장성규에게 '꼬꼬무'는 SBS 입성 첫 프로그램이다. 예능, 유튜브, 최근에는 드라마 카메오 출연으로 연기까지 못 넘는 선(?)이 없는 장성규지만 스토리텔링은 떨리는 첫 도전이다. 제작진과의 첫 만남에서 장성규는 '공부'해서 '전달'하는 일은 자신 없다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토익 점수 900점에 6년째 신문을 구독 중인 개그계의 뇌섹녀 장도연은 바쁜 방송 일정 중에도 스스로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하는가 하면, 제작진이 보내준 자료 내용을 전화로 팩트체크까지 하는 열정을 보여 담당 피디를 감동하게 했다.

몇 시간 동안 혼자 이야기해도 지치지 않는 토크 에너자이저, 타고난 이야기꾼인 영화감독 장항준은 드디어 그에게 꼭 맞는 프로그램을 만났다는 평을 받았다.

이들의 첫 이야기 소재는 1998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지강헌 사건'이었다.

지난 1988년 10월 16일, 88년 서울 올림픽의 흥분이 채가시지 않은 그때 겁에 질린 여성을 인질로 붙잡고 경찰을 향해 요구 사항을 말하던 지강헌의 모습은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권총을 든 인질범, 비명을 지르는 젊은 여성, 요란한 총성과 피 묻은 티셔츠.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주택가에서 실제로 벌어진 인질극을 바라보던 당시 시청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지강헌 일당은 교도소 이감 중 호송 버스에서 탈주했다. 이후 북가좌동 가정집에서 일가족 6명에게 권총과 흉기를 들이대고 인질극을 벌였다.

탈주범들은 자신의 범죄 행각을 중계하는 카메라 앞에 인터뷰하듯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가 하면 선글라스를 쓴 주범 지강헌은 “비지스의 홀리데이!”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했다.

또한 당시 지강헌은 "나는 시인. 미래를 보고 과거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다. 이 장면은 이후 영화 '홀리데이'로도 만들어 졌다.

'꼬꼬무' 출연진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인질극 현장은 사실 30초짜리 티저 영상에 불과하다"며 "그 뒤에는 32년간 밝혀지지 않은 어마어마한 본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32년 전 지강헌 일당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호송 버스가 안성 부근을 지날 때 재소자 중 1명이 교도관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교도관이 소변통을 건네는 순간 재소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난투극을 벌였다. 호송 차량은 죄수들에게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25명의 재소자 중 13명은 안전한 감금을 택했지만 12명은 재소자 카드를 찢어버리고 권총과 실탄을 챙겨 탈출했다. 이 중 2명은 당일에 검거됐고, 3명은 룸살롱에서 접대부를 불러 놀다가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다.

나머지 7명의 죄수들은 인질을 잡아 하루하루를 보냈다. 경찰의 눈을 피해 서울 가정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2번의 인질 숙방에 성공한 이후 한 대학병원 주차장에 침입해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인질로 삼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당시 35세였던 인질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다가와 칼을 겨누는 순간 느꼈다"며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탈주범들과 2박3일 동안 계약 동거를 해야 했다"고 털어 놓았다.

제약회사 직원인 만큼 자신을 협박하는 사람들에게 "수면제를 먹일까" 고민도 했었다고.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 영화와 달랐고, 삼엄한 감시 속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지강헌 일당과 술자리도 가졌다고. 그는 "국산 럼주 캡틴 큐를 함께 마셨다"며 "어려서부터 힘들게 살았고, 이곳저곳에서 이어진 홀대와 냉대로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특히 지강헌은 인질극을 벌이던 당시 "내가 살아오면서 죄를 많이 지었지만, 나에게도 예쁜 모습이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또 시인을 꿈꿨다는 지강헌은 탈주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의 비리를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며 "연희궁에 가려다 경비가 심해 그만뒀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희궁은 전두환의 사가다. 지강헌이 전두환을 만나려 한 건 '보호감호 제도'를 만든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강헌은 7차례에 걸쳐 현금, 승용차 등 약 556만 원을 절도한 혐의를 받고 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보호감호란 재범의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징역 후 감호소에서 머물게 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징역과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다. 결국 지강헌의 경우 17년 형을 선고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보호감호 제도는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 이후 만들었다. 사회악을 척결하겠다면서 국가보위위원회를 신설하고, 영장도 없이 6만 명을 검거해 그중 4만여 명을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장애를 얻게 된 건 유명한 일이다.

이와 함께 '보호감호' 제도를 통해 자전거 1대를 훔쳐도 징역 3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이 법률은 이후 이중처벌, 과잉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2005년에 폐지되었다.

지강헌이 분노한 건 당시 '리틀 전두환'으로 불렸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에 대한 이중 판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경환은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몇백억 원의 횡령을 저질렀고, 재판부에서 인정한 횡령액만 당시 76억 원이었음에도 7년 형을 선고 받는데, 이 역시 3년 정도 살다가 석방됐다. 이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탄생한 것.

22세의 여대생과 그의 부모들은 지강헌 일당을 4번째 인질이었다. 그는 "당시 70이 넘으신 아버지는 '밥은 먹었냐'며 '밥부터 차리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고추장째개와 이것저것을 준비해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식사 후 마음이 누그러진 탈주범들은 여대생에게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고 물었고, "옥상에서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고 의견을 구했다.

여대생은 탈주범들을 순순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성경을 일어줄 것을 결정했고, 당시 지강헌은 그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강헌은 "내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같이 앉아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이들과 1박2일을 보내고 북가좌동으로 이동한 탈주범들은 집주인의 신고로 테러 특공대들과 마주했다. 탈주범들의 가족까지 북가좌동으로 이동했다.

담 밖에서는 인질범들의 폭력성이 강조됐던 상황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인질들에게 총을 겨누며 "미안하다"며 "정말 이럴 생각이 없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과를 했다고.

이후 극한의 상황에 몰린 탈주범들은 연이어 자살을 택했다. 지강헌 역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으며 머리에 총을 겨눴지만, 경찰 특공대가 들이닥쳐 지강헌에게 총 2발을 발사했다. 지강헌은 병원으로 이송 후 4시간 만에 사망했다.

탈주범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당시 막내였던 강모 씨는 경찰에 검거됐다. 선고 공판에서 검찰은 15년을 구형했지만, 인질들이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덕분에 7년 형만 받았다.

탄원서에는 이들 때문에 겁도 먹고, 그들의 행동을 잊을 순 없었지만 아침밥을 먹고 떠나면서 "잘먹었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는 말도 남겼다며, "우리가 떠나면 신고하세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정말 미웠지만 미워할 수 없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 삼아 세상에 좋은 등대지기가 되길 기원한다면서 강 씨가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탄원서를 본 이들은 눈물을 보였다.

5번의 인질극이 있었지만, 단 한명도 희생당하거나 다치지 않았다. 이에 장항준은 "누군가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까"라며 "이들의 인생이 가련하다. '밥은 먹었냐'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그들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인질들의 그런 태도들이 그다음 집의 재앙을 막았던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송은이도 "이 사건의 주인공들이 영웅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여운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 유전는 유죄, 무죄는 무죄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고, 장성규도 "32년 후에 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근현대사 역사책에서만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kimsy@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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