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교│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송혜교│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송혜교의 얼굴은 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흘깃 봐도 예쁜 얼굴에, 그 조막만한 면적을 파악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송혜교는 오랜 시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 얼굴을 가졌다. 만약 10월 27일 개봉한 이정향 감독의 에서 송혜교의 얼굴이 낯설었다면, 어쩌면 당신에게 그녀의 얼굴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았던 경험이 없어서 일 것이다. 은 송혜교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도통 허락하지 않는 영화다. 어린 시절 조각난 가정도 모자라 사랑하는 약혼자까지 뺑소니 오토바이 사고로 앗아간 인정 없는 세상. 악다구니를 쏟아내도 모자랄 판에 이 여자는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던 예수처럼, 다른 이들의 용서를 위해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매고 긴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간다. 그리고 결국 지난 날 자신의 용서가 불러온 비극에 대한 깨달음과 자책 속에 무너져 내린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기 까지 별다른 표정이 없는 캐릭터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작은 근육을 움직이는 연기”를 배워나갔던 시간, 은 송혜교가 구체적인 언어로 써내려 간 첫 번째 배우 일지였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모든 작품에 제 실제 성격이 조금씩 다 들어있겠죠. 하지만 속내가 가장 비슷한 건 의 다혜인 것 같아요. 물론 친한 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밝은 편이고 말도 많이 하지만, 속 성격이 그렇진 않거든요. 좋고 싫은 것도 예전엔 아예 표현 못했고 지금도 잘하는 편도 아니고. 어릴 때는 사람들 만나면 말도 잘 못했어요. 아마 하고 싶었지만 말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렇게 영화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간 이 배우에게 영화는 편하게 마음을 터놓는 소중한 친구다. “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이고 계속 보는 스타일”이라는 그녀 곁을 지켜줄 “같은 영화지만 볼 때마다 달라진다는” 영화 친구들의 주소록이 여기에 있다.
송혜교│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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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는 지금까지 한 10번도 넘게 봤을 거예요. 물론 상황이나 스토리도 좋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디테일한 연출력이 특히 인상적인 영화예요. 영화 후반부 비 오던 날에 메릴 스트립이 차 문을 잡고 있던 순간, 손의 디테일이 주는 감정 전달은 정말 최고라고 생각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단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거요.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열아홉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치기 어린 고백이 아니다. 인생 마지막 장에 이르러 ‘일생 단 한 번의 확실한 감정’을 느낀 남자의 마지막 프로포즈는 그렇게 정통으로 심장을 향해 파고든다. 로버트 제임스 윌러가 쓴 원작의 결을 훼손하지 않은 채 스크린에 이식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섬세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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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reakfast On Pluto)
2005년 | 닐 조던
“일단 다른 걸 다 떠나서 킬리언 머피에게서 이런 면을 발견한다는 게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영화에서 봤던 냉철하거나 거칠고 강한 남성적인 모습에서 이렇게 여성스럽고 연약한 캐릭터로 변신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대단하지 않아요?”

, 을 통해 사회의 민감한 폐부를 찔러댔던 닐 조던 감독의 2005년 작. 아일랜드의 비극적 현실과 여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 패트릭의 고난의 성장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특히 1960, 70년대 팝넘버들로 알차게 꾸려진 OST를 비롯, 실제 아일랜드 출신이자 제작진이 “완벽한 패트릭 키튼을 만났다”며 흥분했던 배우 킬리언 머피의 꿈꾸는 듯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송혜교│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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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년 | 진가신
“봐도 봐도 좋은 영화지만 특히 장만옥 캐릭터가 너무 좋아요. 제가 그동안 드라마에서 순하기만 한 여자를 많이 연기를 해서 인지 (웃음) 그런 캐릭터를 만났을 때는 별로 재미가 없고 흥미가 안 생겨요. 에서 장만옥은 착하다 나쁘다를 떠나서 정말 매력 있는 여자잖아요. 진부하지 않고. 이런 영화나 캐릭터가 있다면 당장 하고 싶을 정도예요.”

진가신 감독의 은 홍콩과 뉴욕을 배경으로 십여 년에 걸쳐 이어질 듯 엇갈리는 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명의 입을 빌어 “어떤 건 인생에 한번이면 충분하다”라고 속삭이는 이 순애보적 멜로드라마는, 동시에 홍콩이라는 대도시로 흘러 들어온 중국인들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당도한 중국 이민자들의 삶 또한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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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es Parapluies De Cherbourg, The Umbrellas Of Cherbourg)
1964년 | 자크 데미
“사랑이 부질없다는 것을 바로 알려주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웃음)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사람인데 결국 딴 사람과 결혼하고 마지막 주유소에서 다시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어요. 뮤지컬 영화라서 요즘 관객들의 눈에는 조금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봐도 좋은 영화죠.”

금발의 앳된 카트린느 드뇌브가 새처럼 지저귄다. 노래라기보다는 일상 대화에 음정과 박자를 가미한 것 같은 독특한 뮤지컬 영화인 은 전쟁으로 인해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 젊은 연인의 이야기다. 누벨바그의 여전사였던 아네스 바르다의 평생의 동반자, 쟈크 드미 감독의 출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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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Wicker Park)
2004년 | 폴 맥기건
“원작인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도 좋아하긴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전형적인 프랑스 영화의 기운이 가득한 보다는 조쉬 하트넷이 주연한 할리우드 리메이크 버전인 가 훨씬 가볍고 경쾌해서 좋더라고요. 다이앤 크루거가 연기하는 리사보다는 스스로 거짓말의 덫에 걸려 버린 여자 알렉스가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한 때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2년 전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린 연인.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옛 연인의 목소리를 따라 들어간 공중전화 부스에서 발견한 의문의 호텔 열쇠를 단서로 남자는 여자의 흔적을 쫓고 이 과정에서 같은 이름의 다른 여자를 만난다. 그러나 이미 타이밍이 엇갈리고 주소를 잘못 찾아간 사랑에 대한 뒤늦은 복원은 힘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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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가 우리 곁으로 온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과학의 세계보다 정서의 세계에 속한 배우였다. 흥분하면 유난히 더 말이 빨라지던 SBS 의 궁뎅이 ‘혜교’부터,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겠다던 KBS 속 소녀, 한 남자의 평생을 SBS 하게 만들었던 바다 끝의 여자, ‘곰 세 마리’로 아시아 프린스를 무장해제 시키던 KBS 의 천방지축 아가씨, KBS 의 미워할 수 없는 ‘주준영’까지, 송혜교에 대한 기억은 딱 떨어지는 ‘명장면 명대사’가 아니라 그 순간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같은 정서적 기억으로 떠오를 뿐이다. 의 첫사랑 소녀처럼 가슴 뛰고 아련한 존재.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 송혜교에 대한 리포트는 무한의 형용사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송승헌 옆의 송혜교, 이병헌 옆의 송혜교, 비 옆의 송혜교, 현빈 옆의 송혜교. 송혜교라는 형용사는 줄곧 어떤 주어를 만나든지 전체 문장을 아름답게 만들어버리는 마법을 부렸다. 하지만 어느덧 소녀에서 여인이 된 이 배우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 계절에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꿈 같이 달콤한 가을날의 동화를 찢고 진짜 ‘용서’가 무엇인지 잔인한 질문을 시작한다. 오늘, 송혜교를 보라. 한때 그녀 앞에 놓였던 수많은 주어들에 대한 장례식을 마치고, 새롭게 쓰여질 문장들을 향해 홀로 걸어가는 배우. 지금 송혜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어다.

글. 백은하 기자 on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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