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손정현 감독 : 원래 같이 기획하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편성 시기가 여름이 되면서 방송사에선 조금 더 젊은, 로맨틱 코미디를 원하면서 바뀌었다. 어쨌든 권 작가님이 상투적인 걸 쓰시는 분은 아니니까 새로운 게 나올 것 같았고, 하지만 상업적인 틀은 필요할 것 같아서 재벌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그렇지만 우리도 ‘마지막 양심’이라고 표현했듯 (웃음), 클리셰들을 조금 비틀어보고 싶었다. 보통 사람들은 재벌을 만날 일도 잘 없지만, 만나도 기가 죽어서 말을 잘 못하는데 드라마 안에서 대리 만족을 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권기영 작가 : 드라마 하나를 제대로 좀 하려면 1년 정도는 시간이 필요한데 는 시작부터 딱 6개월 밖에 없었다. 처음에도 88만원 세대 이야기는 조금 있었는데 그냥 가긴 너무 우울하니까 결국 가장 전형적인 재벌과의 로맨스 틀 안에 넣게 된 것 같다. 우리 드라마를 새롭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하긴 한데,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니고 사실 88만원 세대 캐릭터 외에 나머지 재벌 형제들 설정은 얼마나 진부한가. (웃음) 다만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조금씩만 비틀자는 생각이었다.
“은설이에게 주어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면 좋겠다는 판타지”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의 민희(고준희)가 부나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노은설은 아예 그런 욕망은 꿈도 못 꾸고 “취직이나 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여성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변화인가.
권기영 작가 : 그냥, 대단한 의도나 그런 건 진짜 없다. 다만 그냥 좀 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18부 엔딩이 굉장히 동화적인데, 고민을 많이 했다. 모두가 이렇게 행복해지고 자기 길을 찾는 건 판타지가 아닌가. 그런데 은설이가 마지막에 공부를 한다. 무슨 공부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서른일곱인데 나는 진짜 혜택 받고 운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을 보면 뭔가를 하고 싶어도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른다. 이게 잘못된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사람들이 뭘 해야 할 지 조차도 선택하지 못하는 게 요즘의 현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은설이는 마지막에 혜택을 받은 거다. 얘가 그 전에 꿈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취직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제는 꿈을 갖게 된 거다. 그리고 이렇게 은설이에게 주어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면 좋겠다는, 그런 판타지다.
이 드라마의 관건은 노은설과 차지헌의 감정이 붙는 초반이었던 것 같다. 서로 감정을 확인하는 건 중반 지나서야 있을 법한 일인데, 두 사람은 초반부에 이미 가까워지고 감정을 확인한다.
권기영 작가 : 둘을 가능한 빠르게 붙이려고 했던 건 사실이다. 말 한 마디 하면 풀릴 문제인데 그 말을 못해서 오해가 생기고 하는 상황을 좀 안 해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힘든 지점도 있었다. (웃음) 나중에는 “감독님, 큰일 났어요. 저 사고 친 것 같아요”라고 했을 만큼 걱정도 했는데, 그냥 재미있었다. 캐릭터가 완성되어 가고, 자연스럽게 기업 얘기가 나오고, 은설이가 세상 속에 들어가 작은 풍파를 일으키고 그게 커지고. 사실 되게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는데 그 구조 안에서 생기는 감정이나 일어나는 사건들은 조금이나마 현실적으로 가면 좋겠다고 노력했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갈 때쯤 좀 더 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거나 오해를 만들어서 분량도 뽑고 시청률도 확보하면 좋겠다는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나. 연장도 해야 했고.
권기영 작가 : (연장한다는 얘기에) 울었다. (웃음)
손정현 감독 : 그래서 작가님께 ‘조미료 한 번 쳐 보자’ 유혹을 했는데도 안 넘어오시더라. 지헌이랑 무원이가 사실 배다른 형제라던가 하는. (웃음)
권기영 작가 : 10부 좀 넘어서는 감독님과 진짜 고민이 많았다. 하다못해 교통사고라도 하나 넣을까, 주위에서는 갈등의 부재에 대한 문제도 지적하셨고. 하지만 결론은 시청률이 몇 % 떨어지더라도 지금까지 가져온 캐릭터를 손상시키지 말자는 거였다. 쓰는 입장에서는 진짜 어려웠다. 악역이 있어야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을 유발해야 뭔가가 이뤄지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그래서 캐릭터가 중요했던 드라마이기도 한데, 노은설부터 차봉만 회장까지 결국 정말 악한 사람은 없이 다들 어린 아이 같은 구석도 있다는 설정은 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보여준 것 같다.
권기영 작가 :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흉악범들도 있다. 높으신 분들 중에도 잘못 하시는 분들이 있고. 잘못은 할 수 있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각자의 욕망과 위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가장 큰 의아함을 느끼는 건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그런 점이 안 보이는 것 같은 분들에 대한 얘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살짝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재벌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만든 건, 그들의 좀 모자란 면을 보여주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분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 거고, 모든 사람은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대단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드라마 속 재벌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부분이 있으니까 그걸 조금씩 바꾸다 보니 그런 캐릭터가 나온 것 같다.
의 경우 주인공들에게 강한 트라우마가 있고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는데, 는 지헌이 어느 시점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른 인물들도 밝은 에너지가 더 강한 드라마였다. 과거의 2, 30대와 지금 그 세대에 대한 시각 차가 다소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땠나.
권기영 작가 : 사랑에 대한 관점 자체가 좀 달라졌다. 요즘에는 사랑에 목숨을 걸지 않잖나. 일단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 같다. 같은 시간대 방송됐던 KBS 같은 경우 사극이라는 장르의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녹아 있지만, 현대에는 나 자신도 그렇지 않거니와 사랑 외에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은설이와 지헌이도 사랑을 하지만 이들도 사랑 자체보다 은설이는 대출금, 지헌이는 부모의 잘못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갈등한다. 물론 그런 쪽으로 너무 가면 루즈해 질까봐 최소화시키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런 현실적 문제와 사랑이 좋게 봐야 비슷한 수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절절한 감정을 잘 살리지 못한 것 같아 후회되는 지점도 있긴 있는데, 애초의 생각은 이 캐릭터들이 사랑에 목매는 건 오그라든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는 세대인 것 같다는 거였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기’ 위해서는 연출로 보여줘야 하는 부분도 많았을 것 같다.
손정현 감독 :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편하게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이즈를 너무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기본 바스트 샷 정도에서 클로즈업까지, 그런데 부담 없이 보길 바라서 최대한 가까이 안 들어가려고 했다. 제일 고민했던 건 초반 취업 장면 신인데, 강희 씨가 복싱 하고 “마마마마마마~”춤 출 때 스태프들은 빵빵 터졌다. 그런데 내용은 처연하고, 결국은 궁극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재밌는 신을 죽였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내가 의도한 건 너무 힘주지 않고 심각하지 않게 가면서 한 번씩 툭툭 건드려주는 거였다.
“최강희 씨는 로맨틱 코미디의 DNA를 가진 사람 같다”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전반적으로 대본에 원래 설정된 캐릭터도 있지만 캐스팅 후 그들의 특성이 반영된 느낌도 있다. 박영규 씨 같은 경우 진지해 보이면서도 코믹하고, 원래 이미지에 기댄 듯하면서도 다른 면이 보였는데.
권기영 작가 : 2부까지 쓰고 차 회장님은 정말 누가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는데 박영규 선생님이 하시겠다는 연락이 오는 순간 모두가 정말 아!
손정현 감독 : 하이파이브 했다. (웃음)
권기영 작가 : 나윤 역의 왕지혜 씨 같은 경우는 처음 만났을 때 “시놉시스에 적힌 ‘우아한 척 하지만 사실은 허당’이라는 말이 너무 좋았어요”라는 말만 하고 나를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하면서 너무나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다. 그동안 비슷한 서브 여주인공 역할을 많이 해왔는데 좀 다른 걸 하고 싶은 그 친구의 열망이 텔레파시처럼 왔다. 그래서 캐스팅 후 애초에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나아갔던 지점도 있고, 그게 캐릭터로서도 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손정현 감독 : 최강희 씨는 로맨틱 코미디의 DNA를 가진 사람 같다. 온몸으로 그냥, 오버해도 전혀 오버스럽지가 않다. 지성 씨는 처음에 연기 변신을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좀 고민을 했는데 서로 얘기를 하면서 적절한 선을 알아서 찾아갔다.
김재중 같은 경우 연기 경험이 많지 않고, 차무원이 전형적인 완벽남 재벌 후계자 같으면서도 은근히 허술하고 웃기는 구석도 있는 독특한 캐릭터다 보니 톤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연기에 대해 어떻게 디렉팅했나.
손정현 감독 : 첫 연습했을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서 앞이 캄캄했다. 일단 카메오로 오셨던 안내상 선배에게 “형, 좀 풀어주세요” 부탁드리기도 했고, 지성이나 (최)강희도 재중이가 잘 해야 다 같이 잘된다는 마음이 있어서 많이 도와줬다.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드는 편은 아니니까 마음대로 편하게 해보라고 하면서 최대한 풀어줬더니 4부쯤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끼가 발휘된 것 같다.
권기영 작가 :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한 작품 안에서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빨랐던 것 같고, 사실 작가는 배우를 자주 볼 일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본인 자체가 실제로는 무원이의 캐릭터와 비슷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장난기도 많고 약간 허당 같기도 해서 뒤로 갈수록 본인의 모습이 나온 것 같다. (웃음)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재벌이라는 소재를 활용할 때 상당히 현실적인 지점들을 짚어낸다. 차봉만(박영규) 회장은 한화 김승연 회장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경영권 불법승계 같은 것도 다소 민감한 사안인데 세상도 흉흉하고 하니 창작자로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지는 않던가.
권기영 작가 : 그 점은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은 공화당, 한 명은 민주당 하는 식으로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띠는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그런 유머, 풍자, 다양성 인정이 부러웠다. 오히려 내가 경계했던 건 차 회장 캐릭터가 현실에서는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미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캐릭터를 쓰다 보니 나 스스로 좀 재밌었고. (웃음) 어쨌든 실제로 힘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좀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분들도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재미로 받아주셔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업과 시장에 대한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 문제도, 결론은 판타지적으로 착하게 갈 수 있지만 디테일한 조사나 뻔하지 않게 가려는 태도가 흥미로웠다.
권기영 작가 : 그 문제는 조사를 미리 많이많이 해 놨다. 자료조사 도와주는 분께도 부탁했고, 나도 틈틈이 책을 보면서 기업별로 어떻게 했는지를 찾아봤다. 자료는 재미있는데 디테일을 너무 살리자니 그건 재미가 없고, 드라마적으로 어느 만큼만 설명을 할까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이만~큼 조사를 해 놓고 1, 2% 밖에 못 쓴 것 같다. (웃음)
그렇게 공부해 보니까 경영권 승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 같나. (웃음)
권기영 작가 : 그냥, 머리가 좋으신 것 같다. (웃음) 어떻게 이렇게들 하시나.
김지우 작가의 보조 작가로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김지우 작가는 KBS 때 신문 한 면의 내용을 직접 만들었을 정도로 철저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드라마에 대한 관점이나 디테일한 자료조사라는 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나.
권기영 작가 : 김지우 선생님은 내가 작품을 마친 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은 상태에서 달려가 뵙는,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와 를 선생님과 같이 했는데, 사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신(scene) 구성’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초보였다. 그 때 자료조사하시는 걸 보면서, 비중이 크지 않아도 극 중에 어떤 직업이 나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던가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나한테는 그게 제일 큰 자산이고, 그래서 선생님이 하시는 것만큼은 못해도 가능한 한 비슷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현실적인 디테일도 조금씩 더 살리려고 했고, 그걸 감독님이나 소품팀에서 잘 그려주셨다.
“실제 재벌 2, 3세도 다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역시 그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시선의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정현 감독 : 사실 메시지에 대한 유혹을 몇 번 느낀 적이 있다. 2회에서 은설이가 달을 보면서 “취직하게 해주세요” 할 때 그걸 전태일 열사 동상에 기대면서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건 또 너무 직설법 같아서 접었다.
권기영 작가 : 사람이 희망이라는 건 보통 사람들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재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같이 좀 변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요즘 대기업이 떡볶이 시장까지 잠식하고 있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그걸 누구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 한 명이 파장을 만들게 되면 어떨까. 드라마 속에서는 은설이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냥 돌멩이 같은 애가 하나 들어가서 시끄럽고, 하는 건 싸움 밖에 없지만 솔직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변하게 되도록. 너무 직접적인 대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8회에서는 지헌이나 무원이를 통해 세대교체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담아 본 것도 그래서다.
노은설의 가장 큰 특징이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상식적이고 성숙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윤리관을 가진 사람인데 그런 주인공이 사실 별로 없었다.
권기영 작가 : 그건 정말 교육, 학벌과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웃음) 대사에도 한 번 나왔지만, 자식도 부모도 서로에게서 독립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너무 관여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너무 간섭받는 건 잘못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힘을 가진 분들이 그걸 유지하려고 더 그러시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은설이는 그다지 잘난 아빠를 둔 것도 아니고 자신도 그다지 잘난 사람이 아니지만 내 힘으로 살아나가려는 건강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고민했던 건, 7회까지 쓰고 나니 은설이가 너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려서 사람들의 은설이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을 때다. 이 친구는 그냥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표현을 잘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왈칵 무서워졌다. 8회를 쓰기 시작할 때 “감독님, 은설이가 사람이 아닌 게 돼 버린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은설이의 내적 갈등이나 감정을 좀 더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다른 인물들에게 모자란 면이 많다 보니 참 어려웠다.
그에 비해 차지헌이라는 캐릭터에서 가장 재밌었던 점은 재벌 2세나 3세 캐릭터로는 드물게 업무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물론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사적인 단점이 아닌 사회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독특했다.
권기영 작가 : 사실상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재벌 2, 3세도 다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웃음) 게다가 주변에서 모든 걸 다 해주고, 잘못하면 누군가 수습해주고, 혹은 잘못했더라도 ‘네가 옳다’는 얘기를 해줄 것 같았다. 물론 교육은 다 잘 받겠지만 그러다보면 정신적 성장을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약간 유아적인 캐릭터로 설정했다. 하지만 재벌 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못된 건 아닐 테니 지헌이는 일단 굉장히 착한 친구고, 공황장애라는 부분은 드라마 속에서도 흔히 그려져 왔지만 가족 중에 공황장애를 앓는 분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제였다. ‘드라마에 써도 될까?’라고 물어봤더니 얼마든지 괜찮다고 해서 쓰게 된 거고.
전작 의 시청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흥행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을 것 같다. 특히 요즘같이 치열한 시장 안에서는.
손정현 감독 : 그래서 내가 조미료를 팍팍 치자고 유혹한 건데 안 넘어오셨다. (웃음) 어쨌든 1, 2부 안에 시청자들에게 출생신고를 하고 엄청나게 재밌다는 분위기를 타야 해서 초반 속도를 좀 빠르게 했다.
권기영 작가 : 때는 시청률이 안 나와서 너무 부담을 갖고 썼는데 이번에는 아주 잘 나온 것도 아니고 중간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많이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손정현 감독 : 체감 시청률은 훨씬 높으니까 “그 색깔 잃지 말고 마무리 잘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고마웠다.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을 마쳤는데, 다음에 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권기영 작가 : 잘은 모르겠는데, 원래 감독님과 준비하던 드라마는 판타지였지만 그 뒤에는 대형 로펌이 있었다. (웃음)
손정현 감독 : 나는 타임슬립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같이 하자고 꼬실 생각이었다.
권기영 작가 : 윗분들이 들으시면 기함할 이야기도 많았다. 초능력이나 대형 참사, 근 미래에 벌어지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뭔가 새롭다고 생각하고 기확하다가 알고 보면 비슷한 포맷들이 이미 다 있다. 이번에도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틀을 피해가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숙제인 것 같다. 이미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가기 위해 다른 작품도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사실 드라마는 같이 일하는 사람 간의 갈등이 정말 많을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작품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같이 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어떤 점에서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손정현 감독 : 권 작가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본의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없을 때 나온 대본이라도. 배우들도 그걸 알아보고 얘기해준다.
권기영 작가 : 감독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작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무조건 “괜찮아요” 하시니까, 내가 진짜 못하겠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괜찮아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투정을 부리거나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략을… (웃음)
손정현 감독 : 좋은 작가들은 시간에 몰리면 ‘접신’을 한다고 하지 않나. 내 속이 좀 타도 작가를 믿고 기다려서 완성도 있는 대본이 나오는 게 낫다. (웃음)
인터뷰. 강명석 기자 two@
인터뷰,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재벌 후계자와 여비서의 로맨스’라는 설정은 진부해 보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재벌 3세와 88만원 세대가 계급장 떼고 붙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다. SBS 는 뻔해 보이는 장르의 공식을 뒤집고 비틀며 노은설(최강희)의 발걸음처럼 씩씩하게 달려온 로맨틱 코미디다.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던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고, 마땅히 욕할 캐릭터 하나 없이 모두에게 연민하고 웃음 짓게 만든 어른들의 성장 동화는 순한 남매 같은 두 사람이 만들었다. 가 29일 종영한 의 권기영 작가와 손정현 감독을 만났다.SBS 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나 내놓은 미니시리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손정현 감독 : 원래 같이 기획하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편성 시기가 여름이 되면서 방송사에선 조금 더 젊은, 로맨틱 코미디를 원하면서 바뀌었다. 어쨌든 권 작가님이 상투적인 걸 쓰시는 분은 아니니까 새로운 게 나올 것 같았고, 하지만 상업적인 틀은 필요할 것 같아서 재벌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그렇지만 우리도 ‘마지막 양심’이라고 표현했듯 (웃음), 클리셰들을 조금 비틀어보고 싶었다. 보통 사람들은 재벌을 만날 일도 잘 없지만, 만나도 기가 죽어서 말을 잘 못하는데 드라마 안에서 대리 만족을 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권기영 작가 : 드라마 하나를 제대로 좀 하려면 1년 정도는 시간이 필요한데 는 시작부터 딱 6개월 밖에 없었다. 처음에도 88만원 세대 이야기는 조금 있었는데 그냥 가긴 너무 우울하니까 결국 가장 전형적인 재벌과의 로맨스 틀 안에 넣게 된 것 같다. 우리 드라마를 새롭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하긴 한데,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니고 사실 88만원 세대 캐릭터 외에 나머지 재벌 형제들 설정은 얼마나 진부한가. (웃음) 다만 그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조금씩만 비틀자는 생각이었다.
“은설이에게 주어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면 좋겠다는 판타지”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의 민희(고준희)가 부나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노은설은 아예 그런 욕망은 꿈도 못 꾸고 “취직이나 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여성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변화인가.
권기영 작가 : 그냥, 대단한 의도나 그런 건 진짜 없다. 다만 그냥 좀 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18부 엔딩이 굉장히 동화적인데, 고민을 많이 했다. 모두가 이렇게 행복해지고 자기 길을 찾는 건 판타지가 아닌가. 그런데 은설이가 마지막에 공부를 한다. 무슨 공부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내가 서른일곱인데 나는 진짜 혜택 받고 운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을 보면 뭔가를 하고 싶어도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른다. 이게 잘못된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사람들이 뭘 해야 할 지 조차도 선택하지 못하는 게 요즘의 현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은설이는 마지막에 혜택을 받은 거다. 얘가 그 전에 꿈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취직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제는 꿈을 갖게 된 거다. 그리고 이렇게 은설이에게 주어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면 좋겠다는, 그런 판타지다.
이 드라마의 관건은 노은설과 차지헌의 감정이 붙는 초반이었던 것 같다. 서로 감정을 확인하는 건 중반 지나서야 있을 법한 일인데, 두 사람은 초반부에 이미 가까워지고 감정을 확인한다.
권기영 작가 : 둘을 가능한 빠르게 붙이려고 했던 건 사실이다. 말 한 마디 하면 풀릴 문제인데 그 말을 못해서 오해가 생기고 하는 상황을 좀 안 해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힘든 지점도 있었다. (웃음) 나중에는 “감독님, 큰일 났어요. 저 사고 친 것 같아요”라고 했을 만큼 걱정도 했는데, 그냥 재미있었다. 캐릭터가 완성되어 가고, 자연스럽게 기업 얘기가 나오고, 은설이가 세상 속에 들어가 작은 풍파를 일으키고 그게 커지고. 사실 되게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는데 그 구조 안에서 생기는 감정이나 일어나는 사건들은 조금이나마 현실적으로 가면 좋겠다고 노력했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갈 때쯤 좀 더 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거나 오해를 만들어서 분량도 뽑고 시청률도 확보하면 좋겠다는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나. 연장도 해야 했고.
권기영 작가 : (연장한다는 얘기에) 울었다. (웃음)
손정현 감독 : 그래서 작가님께 ‘조미료 한 번 쳐 보자’ 유혹을 했는데도 안 넘어오시더라. 지헌이랑 무원이가 사실 배다른 형제라던가 하는. (웃음)
권기영 작가 : 10부 좀 넘어서는 감독님과 진짜 고민이 많았다. 하다못해 교통사고라도 하나 넣을까, 주위에서는 갈등의 부재에 대한 문제도 지적하셨고. 하지만 결론은 시청률이 몇 % 떨어지더라도 지금까지 가져온 캐릭터를 손상시키지 말자는 거였다. 쓰는 입장에서는 진짜 어려웠다. 악역이 있어야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을 유발해야 뭔가가 이뤄지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그래서 캐릭터가 중요했던 드라마이기도 한데, 노은설부터 차봉만 회장까지 결국 정말 악한 사람은 없이 다들 어린 아이 같은 구석도 있다는 설정은 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보여준 것 같다.
권기영 작가 :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흉악범들도 있다. 높으신 분들 중에도 잘못 하시는 분들이 있고. 잘못은 할 수 있다. 사람이니까. 그리고 각자의 욕망과 위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가장 큰 의아함을 느끼는 건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그런 점이 안 보이는 것 같은 분들에 대한 얘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살짝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재벌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만든 건, 그들의 좀 모자란 면을 보여주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분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 거고, 모든 사람은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대단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드라마 속 재벌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부분이 있으니까 그걸 조금씩 바꾸다 보니 그런 캐릭터가 나온 것 같다.
의 경우 주인공들에게 강한 트라우마가 있고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는데, 는 지헌이 어느 시점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른 인물들도 밝은 에너지가 더 강한 드라마였다. 과거의 2, 30대와 지금 그 세대에 대한 시각 차가 다소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땠나.
권기영 작가 : 사랑에 대한 관점 자체가 좀 달라졌다. 요즘에는 사랑에 목숨을 걸지 않잖나. 일단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 같다. 같은 시간대 방송됐던 KBS 같은 경우 사극이라는 장르의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녹아 있지만, 현대에는 나 자신도 그렇지 않거니와 사랑 외에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은설이와 지헌이도 사랑을 하지만 이들도 사랑 자체보다 은설이는 대출금, 지헌이는 부모의 잘못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갈등한다. 물론 그런 쪽으로 너무 가면 루즈해 질까봐 최소화시키기는 했는데, 지금은 그런 현실적 문제와 사랑이 좋게 봐야 비슷한 수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절절한 감정을 잘 살리지 못한 것 같아 후회되는 지점도 있긴 있는데, 애초의 생각은 이 캐릭터들이 사랑에 목매는 건 오그라든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는 세대인 것 같다는 거였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기’ 위해서는 연출로 보여줘야 하는 부분도 많았을 것 같다.
손정현 감독 :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편하게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이즈를 너무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기본 바스트 샷 정도에서 클로즈업까지, 그런데 부담 없이 보길 바라서 최대한 가까이 안 들어가려고 했다. 제일 고민했던 건 초반 취업 장면 신인데, 강희 씨가 복싱 하고 “마마마마마마~”춤 출 때 스태프들은 빵빵 터졌다. 그런데 내용은 처연하고, 결국은 궁극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재밌는 신을 죽였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내가 의도한 건 너무 힘주지 않고 심각하지 않게 가면서 한 번씩 툭툭 건드려주는 거였다.
“최강희 씨는 로맨틱 코미디의 DNA를 가진 사람 같다”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전반적으로 대본에 원래 설정된 캐릭터도 있지만 캐스팅 후 그들의 특성이 반영된 느낌도 있다. 박영규 씨 같은 경우 진지해 보이면서도 코믹하고, 원래 이미지에 기댄 듯하면서도 다른 면이 보였는데.
권기영 작가 : 2부까지 쓰고 차 회장님은 정말 누가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는데 박영규 선생님이 하시겠다는 연락이 오는 순간 모두가 정말 아!
손정현 감독 : 하이파이브 했다. (웃음)
권기영 작가 : 나윤 역의 왕지혜 씨 같은 경우는 처음 만났을 때 “시놉시스에 적힌 ‘우아한 척 하지만 사실은 허당’이라는 말이 너무 좋았어요”라는 말만 하고 나를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하면서 너무나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다. 그동안 비슷한 서브 여주인공 역할을 많이 해왔는데 좀 다른 걸 하고 싶은 그 친구의 열망이 텔레파시처럼 왔다. 그래서 캐스팅 후 애초에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나아갔던 지점도 있고, 그게 캐릭터로서도 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손정현 감독 : 최강희 씨는 로맨틱 코미디의 DNA를 가진 사람 같다. 온몸으로 그냥, 오버해도 전혀 오버스럽지가 않다. 지성 씨는 처음에 연기 변신을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좀 고민을 했는데 서로 얘기를 하면서 적절한 선을 알아서 찾아갔다.
김재중 같은 경우 연기 경험이 많지 않고, 차무원이 전형적인 완벽남 재벌 후계자 같으면서도 은근히 허술하고 웃기는 구석도 있는 독특한 캐릭터다 보니 톤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연기에 대해 어떻게 디렉팅했나.
손정현 감독 : 첫 연습했을 때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서 앞이 캄캄했다. 일단 카메오로 오셨던 안내상 선배에게 “형, 좀 풀어주세요” 부탁드리기도 했고, 지성이나 (최)강희도 재중이가 잘 해야 다 같이 잘된다는 마음이 있어서 많이 도와줬다. 카메라 앞에서 주눅 드는 편은 아니니까 마음대로 편하게 해보라고 하면서 최대한 풀어줬더니 4부쯤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끼가 발휘된 것 같다.
권기영 작가 :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한 작품 안에서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빨랐던 것 같고, 사실 작가는 배우를 자주 볼 일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본인 자체가 실제로는 무원이의 캐릭터와 비슷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장난기도 많고 약간 허당 같기도 해서 뒤로 갈수록 본인의 모습이 나온 것 같다. (웃음)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재벌이라는 소재를 활용할 때 상당히 현실적인 지점들을 짚어낸다. 차봉만(박영규) 회장은 한화 김승연 회장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경영권 불법승계 같은 것도 다소 민감한 사안인데 세상도 흉흉하고 하니 창작자로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지는 않던가.
권기영 작가 : 그 점은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은 공화당, 한 명은 민주당 하는 식으로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띠는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그런 유머, 풍자, 다양성 인정이 부러웠다. 오히려 내가 경계했던 건 차 회장 캐릭터가 현실에서는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미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캐릭터를 쓰다 보니 나 스스로 좀 재밌었고. (웃음) 어쨌든 실제로 힘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좀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분들도 이제 좀 여유를 갖고 재미로 받아주셔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업과 시장에 대한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 문제도, 결론은 판타지적으로 착하게 갈 수 있지만 디테일한 조사나 뻔하지 않게 가려는 태도가 흥미로웠다.
권기영 작가 : 그 문제는 조사를 미리 많이많이 해 놨다. 자료조사 도와주는 분께도 부탁했고, 나도 틈틈이 책을 보면서 기업별로 어떻게 했는지를 찾아봤다. 자료는 재미있는데 디테일을 너무 살리자니 그건 재미가 없고, 드라마적으로 어느 만큼만 설명을 할까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이만~큼 조사를 해 놓고 1, 2% 밖에 못 쓴 것 같다. (웃음)
그렇게 공부해 보니까 경영권 승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 같나. (웃음)
권기영 작가 : 그냥, 머리가 좋으신 것 같다. (웃음) 어떻게 이렇게들 하시나.
김지우 작가의 보조 작가로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김지우 작가는 KBS 때 신문 한 면의 내용을 직접 만들었을 정도로 철저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드라마에 대한 관점이나 디테일한 자료조사라는 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나.
권기영 작가 : 김지우 선생님은 내가 작품을 마친 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은 상태에서 달려가 뵙는,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와 를 선생님과 같이 했는데, 사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신(scene) 구성’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초보였다. 그 때 자료조사하시는 걸 보면서, 비중이 크지 않아도 극 중에 어떤 직업이 나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던가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나한테는 그게 제일 큰 자산이고, 그래서 선생님이 하시는 것만큼은 못해도 가능한 한 비슷하게 가려고 노력했다. 현실적인 디테일도 조금씩 더 살리려고 했고, 그걸 감독님이나 소품팀에서 잘 그려주셨다.
“실제 재벌 2, 3세도 다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권기영 작가, 손정현 감독 인터뷰" /> 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역시 그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시선의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정현 감독 : 사실 메시지에 대한 유혹을 몇 번 느낀 적이 있다. 2회에서 은설이가 달을 보면서 “취직하게 해주세요” 할 때 그걸 전태일 열사 동상에 기대면서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건 또 너무 직설법 같아서 접었다.
권기영 작가 : 사람이 희망이라는 건 보통 사람들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재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같이 좀 변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요즘 대기업이 떡볶이 시장까지 잠식하고 있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그걸 누구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 한 명이 파장을 만들게 되면 어떨까. 드라마 속에서는 은설이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냥 돌멩이 같은 애가 하나 들어가서 시끄럽고, 하는 건 싸움 밖에 없지만 솔직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변하게 되도록. 너무 직접적인 대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8회에서는 지헌이나 무원이를 통해 세대교체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담아 본 것도 그래서다.
노은설의 가장 큰 특징이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상식적이고 성숙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윤리관을 가진 사람인데 그런 주인공이 사실 별로 없었다.
권기영 작가 : 그건 정말 교육, 학벌과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웃음) 대사에도 한 번 나왔지만, 자식도 부모도 서로에게서 독립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너무 관여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너무 간섭받는 건 잘못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힘을 가진 분들이 그걸 유지하려고 더 그러시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은설이는 그다지 잘난 아빠를 둔 것도 아니고 자신도 그다지 잘난 사람이 아니지만 내 힘으로 살아나가려는 건강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고민했던 건, 7회까지 쓰고 나니 은설이가 너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려서 사람들의 은설이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을 때다. 이 친구는 그냥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표현을 잘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왈칵 무서워졌다. 8회를 쓰기 시작할 때 “감독님, 은설이가 사람이 아닌 게 돼 버린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은설이의 내적 갈등이나 감정을 좀 더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다른 인물들에게 모자란 면이 많다 보니 참 어려웠다.
그에 비해 차지헌이라는 캐릭터에서 가장 재밌었던 점은 재벌 2세나 3세 캐릭터로는 드물게 업무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물론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사적인 단점이 아닌 사회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독특했다.
권기영 작가 : 사실상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재벌 2, 3세도 다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웃음) 게다가 주변에서 모든 걸 다 해주고, 잘못하면 누군가 수습해주고, 혹은 잘못했더라도 ‘네가 옳다’는 얘기를 해줄 것 같았다. 물론 교육은 다 잘 받겠지만 그러다보면 정신적 성장을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약간 유아적인 캐릭터로 설정했다. 하지만 재벌 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못된 건 아닐 테니 지헌이는 일단 굉장히 착한 친구고, 공황장애라는 부분은 드라마 속에서도 흔히 그려져 왔지만 가족 중에 공황장애를 앓는 분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제였다. ‘드라마에 써도 될까?’라고 물어봤더니 얼마든지 괜찮다고 해서 쓰게 된 거고.
전작 의 시청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흥행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을 것 같다. 특히 요즘같이 치열한 시장 안에서는.
손정현 감독 : 그래서 내가 조미료를 팍팍 치자고 유혹한 건데 안 넘어오셨다. (웃음) 어쨌든 1, 2부 안에 시청자들에게 출생신고를 하고 엄청나게 재밌다는 분위기를 타야 해서 초반 속도를 좀 빠르게 했다.
권기영 작가 : 때는 시청률이 안 나와서 너무 부담을 갖고 썼는데 이번에는 아주 잘 나온 것도 아니고 중간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많이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손정현 감독 : 체감 시청률은 훨씬 높으니까 “그 색깔 잃지 말고 마무리 잘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고마웠다.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을 마쳤는데, 다음에 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권기영 작가 : 잘은 모르겠는데, 원래 감독님과 준비하던 드라마는 판타지였지만 그 뒤에는 대형 로펌이 있었다. (웃음)
손정현 감독 : 나는 타임슬립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같이 하자고 꼬실 생각이었다.
권기영 작가 : 윗분들이 들으시면 기함할 이야기도 많았다. 초능력이나 대형 참사, 근 미래에 벌어지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뭔가 새롭다고 생각하고 기확하다가 알고 보면 비슷한 포맷들이 이미 다 있다. 이번에도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틀을 피해가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숙제인 것 같다. 이미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가기 위해 다른 작품도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사실 드라마는 같이 일하는 사람 간의 갈등이 정말 많을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작품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같이 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어떤 점에서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손정현 감독 : 권 작가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본의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없을 때 나온 대본이라도. 배우들도 그걸 알아보고 얘기해준다.
권기영 작가 : 감독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작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무조건 “괜찮아요” 하시니까, 내가 진짜 못하겠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괜찮아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투정을 부리거나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략을… (웃음)
손정현 감독 : 좋은 작가들은 시간에 몰리면 ‘접신’을 한다고 하지 않나. 내 속이 좀 타도 작가를 믿고 기다려서 완성도 있는 대본이 나오는 게 낫다. (웃음)
인터뷰. 강명석 기자 two@
인터뷰,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