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은 유독 “적당히” 라는 말을 자주 썼다. 사실 창작자들에게 있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이 ‘적당히’라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9월 29일 개봉하는 영화 <카운트다운>에서 타고난 미모와 머리로 세상을 조롱하다 뒤통수 한번 크게 맞는 미워 할 수 없는 팜므파탈, 차하연을 연기하는 전도연. 그러나 정작 그녀는 적당히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의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에 쓸 에너지를 가장 현재적인 것에 쏟아 붓는 배우 전도연의 적당하지 않은 삶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
<카운트다운>은 첫 인상과 마지막 인상이 완전히 다른 영화였어요. 예고편을 봤을 때는 전도연, 정재영의 속고 속이는 두뇌 싸움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강한 드라마로 마음을 울리는 영화더군요. 전도연: 그러니까요. 영화의 시작과 끝이 참 다른 영화죠? 액션도 강하고 드라마도 센데 아무래도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어떤 첫 인상으로 가는 게 좋을까 홍보하시는 분들이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관객 중에는 단순히 액션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의외로 드라마도 있고 감동도 있어서 좋았다는 의견도 있고 그래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카운트다운>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뭐였나요?
전도연: 시나리오 자체도 좋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차하연’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더 끌린 것 같아요. 차하연은 사실 보이는 매력이 더 큰 캐릭터잖아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모로 무장한 (웃음) 팔색조 같은 사기 전과범. 그 점이 이미 매력 적이었어요. 물론 이 여자에 대한 자세한 역사가 나오지 않지만 17년 전에 낳은 딸을 계속 찾아갔다는 설정이 있잖아요. 사실 모른 척 하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법한데 끊임없이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 했던 여자였던 거죠. 되게 냉정하고 찔러도 피 한방을 안 나올 것 같지만 사실 속은 따뜻하고 여린 여자가 아닐까, 하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사람같이 보였달까요.
“<카운트다운>에서 제 역할은 ‘적당히’가 ‘베스트’였어요”
전도연: 듣고 보니까 가슴만 따뜻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빈 구석도 많은 여자네요. 너무 매력 있잖아요, 그런 사람. (웃음) 사실 제가 조금 더 포커스를 맞춘 건 여자 차하연, 사람 차하연이었어요. 결국 한 사람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가는 누가 봐도 나쁜 년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여자에게서 진정성이나 연민이 느껴지도록. 대신 차하연이란 캐릭터는 내가 아무것도 더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만들어진 게 많은, 완벽히 풀 세팅된 캐릭터니까. 거기에 내가 뭔가를 더한다면 그건 오버고, 오히려 인물에 대한 이입이나 공감대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적당히. 이 영화에서 제 역할은 ‘적당히’가 ‘베스트’였던 것 같아요.
의외네요. ‘적당히’라니.
전도연: 어쨌든 <카운트다운>은 태건호(정재영)의 드라마니까요. 그의 드라마에 속에서 차하연은 비교적 장치적인 캐릭터고요. 그래서 태건호란 인물에 감정적으로 너무 빠지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차하연의 상황에도 너무 빠지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그렇게 적당히 하는 것이 가장 ‘차하연스럽다’고 생각했죠.
<하녀>를 끝내고 <카운트다운>을 선택하기 전, 조금이라도 자신이 더 중심이 되는 작품을 원하지는 않았나요.
전도연: 음… 그런 작품이 없었어요.(웃음) 사실 지금까지 선택한 모든 작품 중에 의도하거나 계획하거나, 어떤 캐릭터나 어떤 작품을 꿈꿔서 한 적은 없었어요. 단지 저에게 주어진 것들 중에서 그때 제일 하고 싶은 걸 선택 했을 뿐이었죠. 사실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는 작품이 항상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캐릭터가 좋아도 작품이 나쁘면 못하는 거고, 내 역할이 그저 일부라고 해도 작품이 좋으면 참여할 수도 있는 거고. 그저 그때 그때에 가장 충실한 선택을 한 거죠.
정말 우문일 수도 있는데요. <카운트다운>이 결국 태건호의 드라마라고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문득 영화가 자기에게 조금 더 집중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진 않나요?
전도연: 만약 그런 욕심들이 생겼다면 작업을 하면서가 아니라,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생겼겠죠. 이미 그 시나리오를 오케이하고 결정을 했다는 건 내가 이 영화에서 해야 할 몫을 알고, 그 몫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밀양>에서의 송강호가 그런 역할의 좋은 예가 아닌가 싶어요.
전도연: <밀양>에서 송강호 씨는 너무 나도 빛이 났고, 이전과는 다른 송강호였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되게 멋있고요. <밀양>에서 김종찬이 신애 주변을 늘 맴돌잖아요.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송강호 씨가 촬영 내내 유지했던 것 같아요. 적당히 항상 한 발 물러나 있는 거리. 사실 과하거나 모자란 건 오히려 쉬울 수 있지만 적당히 하는 게 힘들고 어려운 건데 <밀양>에서 배우 송강호는 너무 존경스럽고 휼륭했어요. 저는 예전부터 송강호란 배우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그냥 좋은 걸 뛰어넘는 순간을 만든 것이 <밀양>이었어요.
<카운트다운>에서 본인의 ‘적당히`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 가요?
전도연: 잘하지 않았나요? (웃음) 만약 태건호의 드라마에 제가 방해가 되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많이 동요하지도 않고 잘 따라가 주었다고 생각해요.
“결혼하고 나서는 사는 게 좀 더 피곤해지죠”
전도연: 사실 그렇게 나 오래되었는지 몰랐어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아 벌써 9년이나 지났구나 했죠. 그 사이 정재영 씨도 정재영 씨 나름대로 저도 저 나름대로 좋은 배우로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피도 눈물도 없이> 때는 정재영 씨도 신인이었고, 저도 어떻게 보면 신인이나 다름이 없는 시작이었잖아요. 아직은 보여 준 것보다 보여 줄 것이 더 많은. 사실 <피도 눈물도 없이> 촬영할 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든요. 그냥 말 없고 진지하고 무거운 사람이라고 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정말 그 분을 몰랐던 거죠. 밑도 끝도 없는 농담을 쉼 없이 하는데 계속 웃어주면 끝도 없이 더하니까 어느 순간에는 그만 웃어줘야 해요. (웃음) 하지만 일단 촬영이 들어가면 예민한 집중력을 보여주거든요. 그런 조율을 스스로 잘하시더라고요. 이번 영화가 거의 올 로케이션이라서 배우도 배우지만 스태프들도 많이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정재영이란 배우가 있어서 힘들어도 웃으면서 찍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보통 감독들은 인상을 쓰고 있다가도 여배우가 오면 웃는다는데, <카운트다운> 감독님은 정재영 씨만 보면 웃으셨어요.
<접속>에서는 “천사병 걸렸다”는 말을 들을 만큼 착한 여자였고, <약속>도 <내 마음의 풍금>도 <인어공주>도 뭔가를 꾹꾹 누르는 강인한 여자의 느낌이 강했어요. <카운트다운>은 대신하고 싶은 거 다하는,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캐릭터잖아요. 어떤가요? 지르는 역할을 할 때는 더 시원한가요?
전도연: 누르는 캐릭터라고 해서 연기하면서 답답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고 시원하지도 않고요. 설사 보는 사람에게 답답하거나 시원해 보인다고 해도, 그저 그건 모든 캐릭터가 무언가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인 거죠.
예전 인터뷰에서 진짜 꿈은 뭐였냐고 물었을 때 결혼이라고 대답해서 꽤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막연히 일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전도연: 그 때는 일을 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들이 되게 힘들더라고요. 일이 끝난 이후 덩그러니 혼자 놓여 졌을 때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뭘 하고 즐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공허함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닥쳐올 때면 막연하게 결혼하면 답이 있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니까. 어쩌면 결혼에 모든 정답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결혼을 해보니까 답이 있던 가요? (웃음)
전도연: 그렇게 해서 해결 되지 않는 문제는 결혼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건 누군가 옆에 있다고 달라지진 않는다는 거죠. 결국 나의 문제이니까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혹은 내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 있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는 아닌 거죠.
2009년 1월에 낳은 딸이 이제 벌써 3살입니다. 이렇게 아이나 남편처럼 뿌리내리는 관계라는 것이 생기고 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나요?
전도연: 삶의 태도가 변한다기 보다는 사는 게 좀 더 피곤해지죠. (웃음) 처음엔 제가 이상한 여자인가? 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냥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있을 줄 알았어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런데 아이가 있다고 모성이 갑자기 확 더 생겨나서 아! 난 이제 완전한 엄마야… 이렇진 않아요. 그 역시 끊임없이 엄마로서 노력해서 채워나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아이도 일도 되게 소중한 거잖아요. 둘 다 최선을 다하고 싶고요. 그렇게 되니까 몸이 피곤해지는 거예요. 물론 확실히 더 큰 보상이 있어요. 그래서 계속 하게 되고 견디게 되는 것 같아요.
여배우 역시 결혼과 출산을 하면 뭔가 바뀔 거다, 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가정과 아이가 생긴 이후 배우로서의 변화를 느끼나요? 만약 <밀양> 같은 영화를 지금 찍는다면 다를까요?
전도연: 삶의 사건이나 변화에 하나하나 영향을 받느냐, 혹은 받지 않느냐는 사람마다 다른 거지, 배우라서 특별한 것 같진 않아요. 물론 어떤 식으로 든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걸 의도한 상태로 연기에서 다르게 표현하는 것 같진 않아요. 지금 <밀양>을 다시 찍는다 하더라도 뭘 더 잘할 수 있을까요? 뭐가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건 그 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거였다고 생각해요. 이미 지난 것이니까요.
“배우는 결국 혼자라고 생각해요”
전도연: 쉽지 않은 부분이긴 해요. 하지만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저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고 충실 하는 것 외에는 없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제작을 해봐라는 말도 하지만 저는 그다지 적극적인 배우는 아닌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제일 저답다고 생각해요. 열정이건 욕구건 끊임없이 솟아나야 하는데 그 이상이 저에겐 없더라고요. 저는 연기 이외에 다른 생각이 별로 없어요.
친분이 있는 감독님들에게 저 놓고 시나리오 좀 써주세요! (웃음) 같은 제안은 안 하나요?
전도연: 자존심 상해서 안 해요. (웃음) 사실 저를 놓고 써보세요, 했는데 그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들면 싫어요,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냥 맞는 캐릭터가 있으면, 맞는 작품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주시겠지, 생각하는 거죠. 저는 제가 책임 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을 벌이는 게 싫어요.
얼마 전 공유 씨 만났는데 <도가니> 시사 후에 전도연 누나가 보내준 메시지에 뭉클했다고 하더라고요.
전도연: 경쟁작이라 <도가니>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웃음) 책을 읽었을 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진짜 무서운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책을 봐도 힘든데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그 촬영이 참 쉬운 게 아닐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공유와 정유미가 참 잘 버텨준 것 같았어요. 그게 대견하더라고요.
의도적으로 경쟁작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 건 아니었고요. (웃음) 어느덧 전도연이란 배우도 이렇게 후배들을 챙기고 격려해줘야 하는 위치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전도연: 아니에요. 저 되게 격려 안 해줘요. 누가 누굴 격려하겠어요. 저도 격려 받아야 할 사람인데. (웃음) 그렇다고 격려 같은 건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서서 누군가를 격려할 입장은 아니라는 거죠. 물론 선, 후배가 있긴 있겠지만 작품 앞에서 연기에 있어 선후배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어느덧 30대 여배우의 중심에 있고 후배들에게는 롤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데요. 혹시 본인에게 지워진 짐이나 기대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은 없나요?
전도연: 저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 지를 신경 쓰며 사는 사람이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를 신경 쓰며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남의 생각을 무시한다는 건 아니지만 비중적으로 보면 내 스스로의 요구에 더 신경을 쓰는 거죠.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된다거나, 칸의 여왕 같은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 건 결국 남들의 시선에서 요구되는 저잖아요. 물론 그런 위치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전도연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높고, 어떤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열심히 하고 살고 싶어요. 그런 기대가 있다는 건 기분이 좋지만 이런 여배우로 남아야 해, 하는 강박은 없어요. 배우는 결국 혼자라고 생각해요. 혼자 선택해서 혼자 카메라 앞에서 혼자 견뎌내야 하는 직업.
전도연이란 사람은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늘 무언가와 연애 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배우로서의 가장 큰 생명력이기도 하고. 요즘은 무엇과 연애 중이신가요?
전도연: 음… 너무 많은데? 일도 있고 가정도 있고. 하지만 결국 나 자신? 다른 사람들을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령 카메라 앞처럼, 정말 어떤 이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믿을 수 있는 건 저 자신 밖에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려고,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남한테 이해 받지 못할 때가 되게 많잖아요. 내가 나를 이해 안 해주는데 누가 나를 이해해 주겠어요. 그래서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기 보다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게 되는 거죠. 그래, 전도연 너는 그래도 돼, 하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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