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RCUS’가 아니라 ‘CIRCUSSSS’, 밴드 W&Whale이 2년 만에 선보인 미니앨범 타이틀에는 멤버 수만큼 S가 붙어있다. W&Whale은 “네 사람의 서커스라는 뜻”이라 설명했다. 1993년 그룹 코나로 데뷔해 ‘우리의 낮은 당신의 밤보다 아름답다’를 불렀고 한재원(건반), 김상훈(베이스, 기타, 드럼)과 함께 지금의 W&Whale의 전신격인 W를 결성했던 맏형 배영준(기타)에게는 18년의 세월이, 2006년에 새로운 보컬로 합류해 일렉트로닉에 눈을 뜨게 된 막내 웨일(보컬, 기타)에게는 5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이다. 한 통신회사의 CM송으로 사용된 1집 타이틀곡 ‘R.P.G Shine’, MBC 과 등의 OST 작업 등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가 종종 있어왔지만, 메이저 시장의 한가운데로 진출하기엔 일렉트로닉은 여전히 생소한 장르였다. 하지만 W&Whale은 긴 공백기를 가질지언정 결코 고집을 꺾지 않고 “장인정신”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돈 잘 벌려면 음악하면 안 된다”는 씁쓸한 현실과 “드디어 밴드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기쁨을 동시에 맛본, 그야말로 한 편의 서커스나 다름없었던 W&Whlae의 지난 시간에 대해 들어보았다.다들 의상이 ‘블링블링’하다. (웃음)
배영준: 지난 앨범에서 남자 멤버들의 이미지가 획일화된 기계였다면 이번에는 웨일 양 뿐만 아니라 남자 멤버들까지 모두 블링블링하게 콘셉트를 잡았다. 각자의 캐릭터를 부각시켜서 전작과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2년 만의 새 앨범이라 그만큼 고민의 시간도 길었을 텐데, 음악적인 변화가 우선이었나 아니면 전체적인 콘셉트를 먼저 잡고 음악을 만들었나.
배영준: 우리는 이런 분위기로 가야돼, 이렇게 시작한 건 아니었다. 웨일 양이 만들어 온 ‘소녀 곡예사’ 덕분에 앨범의 전체적인 그림을 잡을 수 있었다. ‘소녀 곡예사’를 뿌리로 해서 ‘소년 마법사’가 나왔고 그 다음에 ‘Break It Down’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같은 곡들이 가지치기하듯 탄생했다.
“웨일은 꽃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우리 팀을 이끌고 가는 톱니바퀴” 웨일이 가져 온 ‘소녀 곡예사’ 데모버전은 어떤 느낌이었나.
배영준: 블루스 색깔이 굉장히 강하고 흙먼지 냄새 나는, 영화 에 나올법한 곡이었다.
한재원: 웨일 양이 우리한테 굉장한 자극이 되고 있다.
그만큼 팀 내에서 웨일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뜻인가.
배영준: 2006년에 웨일 양을 영입했을 때는 이 정도의 역할까지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걸출한 보컬리스트가 들어왔으니 이 친구에게 잘 맞는 곡을 써서 활동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가르쳐 준 적도 없는 기타를 막 연습하더니 어느새 잘 치게 되고 이제 곡까지 써오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우리 팀에서 단순히 꽃의 역할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우리 팀을 이끌고 가는 거대한 톱니바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웨일: 사실 W&Whale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일렉트로닉 장르를 거의 몰랐다. 당시에는 재즈, 블루스, 어쿠스틱한 음악을 주로 좋아했기 때문에 오빠들과 이질감을 많이 느꼈다. 그러다가 오빠들과 함께 작업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일렉트로닉 장르에 대한 매력을 정말 많이 느껴버렸다. 그래서 이번 앨범에는 어떻게든 곡을 써서 이 곡이 오빠들의 편곡을 통해 바뀌고 완성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종의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던 건가?
웨일: 그렇다기보다는 오빠들을 믿은 거였다. 초반에는 재원 오빠의 편곡을 거쳐 데모곡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바뀌는 걸 보고 꽤 혼란스러웠는데, 한 5년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신뢰가 생겼다. 이젠 오히려 “오빠 마음대로 확 바꿔주세요!” 라고 말할 정도다. 완성된 곡을 받아 보니 정말 내 곡에 날개가 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만든 곡이 앨범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굉장히 짜릿했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이번 앨범이 나한테 첫 앨범이다.
방금 웨일이 말한 것처럼, 예전 앨범들이 밴드 W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세 멤버들 간의 믿음으로 완성된 결과물이라면 이번 미니앨범은 웨일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러난다. 전자 사운드도 과거보다 과감하게 사용한 것 같고.
한재원: 사실 소스와 리듬만 강해진 거지 악기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웨일 양이 열정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보컬을 더 많이 살려주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악기 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웨일: 하지만 욕심부터 앞서서 오빠들한테 무리한 요구도 많이 했다. 음악을 듣다가 좋은 소스가 있어서 오빠들한테 추천해주면 “웨일아, 네가 써 온 곡과 이 연주는 안 어울려”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많았다.
연주파트에서 웨일의 이런 요구만큼은 정말 무리였다 싶은 게 있나.
한재원: 모두 다!
일동: 으하하하하.
배영준: 웨일 양이 스티비 레이본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우리한테 그 분처럼 기타 솔로 좀 해보라며. (웃음)
한재원: 웨일 양 취향이 정말 하이클래스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니까 정말 미안했다.
웨일: 내가 아직 어리고 경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우리 팀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고치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완전 다른 동네 얘기를 갖고 와서 부탁하니까 어리석은 거지. 며칠 전에는 현악기가 들어간 편곡을 부탁했다.
한재원: 그것도 진짜 연주로! 아니, 마음이야 얼마든지 해주고 싶지.
배영준: 마음 같아서는 런던 필하모닉도 데려올 수 있다.
“잘 쓴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W ‘and’ Whale이 아니라 W ‘with’ Wahle 같은 느낌이다.
한재원: 우리 입장에서는 ‘with’가 좋은데 웨일 양 미래를 생각하면… (웃음) 솔로 앨범도 나와야 된다.
배영준: 웨일 양이 어쿠스틱한 음악도 굉장히 멋있게 잘한다. 그런 스타일의 솔로 앨범을 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다음에 그 재능을 W&Whale에게 돌려줬으면 좋겠다.
웨일: 아직까지는 솔로 계획이 없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음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는데, 지금은 일렉트로닉이 정말 좋아서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배영준: 그래서 우리가 억지로 ‘Whale in My Place’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웨일이 AC/DC나 라디오 헤드 같은 록 밴드의 명곡들을 어쿠스틱 기타로 재해석해서 UCC 동영상으로 만든 다음에 유투브에 올릴 예정이다.
한재원: 상상이 안 가겠지만 정말 멋있다.
웨일: 아직은 그냥 집에서 끄적끄적 하고 있는 상태다. (웃음)
11월 정규앨범 발매를 앞두고 나온 미니 앨범이지만, 하나의 완결된 앨범 같은 구성이다. 인트로 ‘Burlesque’가 쇼의 시작을 알린 후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소년 마법사’에서 한 템포 쉬었다가 마지막 ‘Break It Down’에서 ‘지구를 떠나자’라는 가사로 막을 내린다.
배영준: 사실 모든 앨범을 다 그렇게 만들고 싶다. 상훈이와 재원이가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데, 상훈이가 ‘처음에 계획한 걸 차곡차곡 쌓아서 딱 정리가 되어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김상훈: 잘 쓴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앨범의 스토리텔링을 만들기에 앞서 각자가 데모곡을 가져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나.
배영준: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숙제검사 하듯 모여서 그동안 만든 곡들을 들어보고 3명 이상이 좋다고 했을 때 작업이 시작된다. 투표결과 2:2가 나온 곡들이 꽤 많았는데 아쉽지만 그건 앨범에 싣지 않는다.
요즘에는 디지털 싱글이 많이 나오는 추세라 완성된 형태의 앨범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앨범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한재원: 똑같이 정성들여 작업했는데 디지털 싱글로 나와버리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모든 노력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느낌이다.
배영준: 디지털 싱글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한테는 생소하다. 우리는 여전히 CD 콜렉터이기 때문에 CD 재킷부터 음악까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킷만 손에 쥐고 있어도 그 음악이 내 것이 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기왕이면 좋은 종이에 디자인을 하고 싶고, 기왕이면 제일 잘 나온 웨일 양 사진을 싣고 싶은 마음이다.
웨일: 미니앨범을 내더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오빠들을 보면 내가 이런 분들과 함께 음악하고 있구나, 하면서 놀랄 때가 많다.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킨다는 생각이 들어 자랑스러웠다. 이건 장인정신이다.
배영준: 그렇게 좋은 얘기는 진작 좀 해주지. (웃음)
얼마 전 MBC 라디오 에서 웨일이 “과일만 먹던 청순한 여자에서 고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말한 것처럼, 약 5년이라는 시간동안 음악적인 면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겠지만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분명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웨일: 아하하하하. 변한 건 정말 많다. 5년 동안 멤버들 외에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족이 생긴 느낌이다. 영준 오빠는 거의 아버지다. 매일 부대끼는 편안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재원 오빠는 친언니 같고.
한재원: 우리 둘만 아는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웨일: 기집애, 이런 건 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웃음) 상훈 오빠는 진짜 친오빠 같다.
한재원: 하지만 안 좋아진 부분도 있다. 웨일 양이 초반에는 만나는 친구들이 있더니 차츰 줄어들었다.
웨일: 이 세 명으로도 충분하니까 굳이 만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서 친구가 없어졌다.
한재원: 사실 우리 셋도 친구가 없다. 우리는 그게 문제다. 하하.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음악적인 갈등이 전혀 없었다” 뮤지션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
배영준: 서로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항상 편하지는 않다. 저 친구는 저런 사람이니까 이해해야지, 절대 이렇게 생각 못한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이런 과정을 이미 다 겪었기 때문에 우리 아빠 성격이 이래, 우리 오빠 성격은 저래, 이렇게 되새기지 않아도 그냥 안다.
이런 과정이 음악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나.
배영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밴드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보는데, 우리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그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그 전에 수많은 공연을 하면서 그런 믿음이 조금씩 생겼다. 하지만 공연은 일회성인데 반해 녹음작업은 긴 시간을 가지고 집중력 있게 지켜보는 거니까 이번 앨범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폭발했다.
웨일: 그래서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음악적인 갈등이 전혀 없었다.
밴드 내부적으로는 이미 하나의 단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라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여전한가.
배영준: 음악하는 18년 동안,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음악하자는 말이 떠돌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을 땐 우리 다 끝났다고 한숨 쉬고, 좀 지나니까 사람들이 CD를 안 산다고 한숨 쉬고, 좀 지나니까 아이돌 그룹이 유행이라 음악 하기 어렵다고 한숨 쉬고, 늘 시장은 안 좋아지고 있었다. 돈 잘 벌려면 음악하면 안 된다. 음악은 재밌으려고 하는 거다. 정말 뻔한 사실이지만 내 모든 걸 걸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재밌으면 듣는 사람도 재밌어 한다는 거다.
청자들이 이번 앨범을 어떻게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나.
배영준: 물리적으로는 정말 장인이 피땀 흘려서 잘 만든 앨범이었으면 좋겠고, 내면으로 들어가자면 이 CD를 듣는 15분만이라도 인생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여기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이번 < CIRCUSSSS >는 W&Whale에게 어떤 의미의 앨범이 될 것 같나.
배영준: 음악이 즐거워지고 내가 우리 멤버들을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존경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기억될 것 같다.
웨일: 나도 마찬가지다.
한재원: 지금도 10년 전에 작업했던 곡을 들으면 마냥 뿌듯하다. 완성도를 떠나 정말 맛있는 밥이었다. 이번 앨범을 10년 후에 들었을 때도 그럴 것 같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
김상훈: 이 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눈물이 많이 나올 것 같다.
한재원: 네 안에는 소녀가 있어. (웃음)
글, 인터뷰. 이가온 thirteen@
인터뷰. 위근우 기자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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