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들리 쿠퍼는 잘 생겼다. 굳이 조지타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능숙한 프랑스어 실력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는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다. 누가 봐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이 확고한 미남이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은 필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데뷔작 <섹스 앤 시티>에 짧은 순간 등장했을 때도 젊은 시절 미키 루크를 닮은 미소 하나만으로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를 홀리는 미청년이었다. 물론 많은 미남 배우들이 그랬듯 아름다운 얼굴은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지만 어느 순간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섹시한 꽃미남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브래드 피트가 <델마와 루이스>의 카우보이 이미지를 지우고 데이빗 핀처의 <세븐>으로 거듭나기까지 10여 편의 작품을 쌓아야만 했던 것처럼 브래들리 쿠퍼 역시 <더 행오버>를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여주인공의 마음을 잠시 흔들어 놓는 잘생긴 남자였다.
그러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메가 히트를 기록한 <더 행오버>는 브래들리 쿠퍼의 미처 발굴되지 못했던 매력을 캐내는 광맥이 되었다. 3천 5백만 달러의 제작비로 2억 7천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전미 흥행 1위를 일궈낸 이 문제작은 남자들이 어디까지 ‘찌질’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수 있는지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영화다.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다음 날, 방 안에 호랑이가 들어앉아 있어도 갓난아이가 울고 있어도 총각파티를 위해 모인 친구들은 잠깐 당황하고 이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 데 더 몰두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브래들리 쿠퍼는 무리 중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리더였지만 술 마시면 여지없이 막 나가고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걷은 돈으로 놀러 다니는 대책 없는 선생이었다. 이 잘 생기고 완벽해 보였던 남자는 그에게 있었던 빈 구석이 얼마나 유쾌하고 강력한 것이었는지 좌충우돌 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꼼꼼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그 모자람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르러 그에게 배우로서의 전환점을 제공한다.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팻은 아내와의 이별 이후 대책 없이 망가진 뒤, 이제 막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 거기다 자신을 멀리하는 아내에게 집착하고, 조울증과 망상증을 오가며 부모를 힘들게 한다. 티파니(제니퍼 로렌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 되던 “미친” 상태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귀여운 상태와 ‘찌질한’ 상태를 오가며 미쳤지만 사랑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매력의 경지를 개척한다. 미남이 배우로 거듭나기까지 그는 연기파 배우들이 흔히 거칠 법한 살인범, 형사 등의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를 거치지 않고도 배우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며 배우로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브래들리 쿠퍼가 자신의 베스트 5 영화 목록을 공개했다.
1. <뉴욕 스토리> (New York Stories)
1989년 | 우디 앨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라이프 레슨’의 주제의식이 마음에 들어요. 정말 멋져요. 스콜세지가 여성에게 집착하는 사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도, 스토리상으로도 아주 잘 포착해요. 닉 놀테 연기도 아주 죽여줘요. 스콜세지 감독님이 워낙 세련되게 모든 상황을 통제해서 감독이 뽐내는걸 보는 느낌이 아니라, 묵직한 스타일과 스토리가 잘 어우러진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죠. 스콜세지 감독님 본인이 그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만드는데 얼마나 오래 고심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감독님의 재능이 편안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았어요.”
우디 앨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한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영화 한편을 채우기엔 충분한 아우라를 가진 거장들이 뉴욕이라는 지붕 아래에 모였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라이프 레슨’에서는 닉 놀테가 잭슨 폴락을 떠올리게 하는 뛰어난 화가 리오넬 도비로 등장하는데 남성적이었던 이전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찌질함’이 발군이다.
2. <셀레브레이션> (The Celebration])
1998년 | 토마스 빈터베르그
“이 영화는 혁신적인 영화 촬영과 근사한 스토리텔링의 정석이에요. 아주 감동적이죠. 우선 주제의식이 굉장한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연기도 엄청나요. 제가 전에 본적 없는 완전한 원칙주의로 만들어진 영화랄까요. 카사베츠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잖아요. 인공 조명, 인공 액션은 없다는 원칙 하에서 트랙이나 크레인 촬영도 전혀 없는 거죠. 모두 손으로 찍은 비디오 촬영 영화 말이에요.”
작가주의 이론과 테크놀러지를 반대하는 도그마 선언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함께 이 선언에 참여했던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이 연출했다. <셀레브레이션>은 감독의 최근작 <더 헌트>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묻고 있다. 1998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3. <잠수종과 나비>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2008년 | 줄리앙 슈나벨
“<잠수종과 나비>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입니다. 매티유 아맬릭, 엠마누엘 자이그너, 마리-조지 크로즈 등 배우들의 연기, 영화의 스토리, 사상의 포착 어느 것 하나 모자란 것이 없죠. 줄리앙 슈나벨 감독님은 정말이지 굉장한 분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감금증후군을 앓게 된 남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공포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주인공의 발병을 지켜보는 내내 폐소공포를 느낄 만큼 영화는 보는 이와 깊은 일치감을 끌어낸다. 실제 감금증후군에 걸린 프랑스 패션지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투병 중에 집필한 <잠수종과 나비>를 원작으로 두고 있다.
4. <컨버세이션> (The Conversation)
1974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은 70~80년대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 중 한 분이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영화를 꼽은 이유는 음향 편집 때문이에요. 진 핵크만이 도청 전문가 역할을 하긴 하지만, 영화의 음향이 정말로 혁신적이에요. 배경음으로 잘 들리지 않는 대화가 나오는데, 그게 영화의 주된 대화라서 마이크 위치를 마구 옮겨 다니는데 그런 효과들이 흥미로워요.”
신뢰보다 불신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은 믿으려 한다. <컨버세이션>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파고든 영화다. 도청 전문가 해리 콜(진 핵크만)이 수집한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서 내린 결론을 진실과 혼동해가는 과정을 통해 진실과 믿음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5. <모퉁이 가게> (The Shop Around The Corner)
1940년 | 에른스트 루비치
“저의 베스트 목록에 코미디 영화를 꼭 넣고 싶었어요. 이 영화와 영화 속 제임스 스튜어트,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코미디 화법 모두 기억이 생생해요. 그런 영화가 물론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개의 스토리라인이 마지막에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가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앙숙이었던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진심을 깨닫고 연인이 된다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이 된 영화다.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주연을 맡았던 로맨틱 코미디 <유브 갓 메일>의 원작이기도 한 <모퉁이 가게>는 <유브 갓 메일>보다 한층 더 발랄하다.
브래들리 쿠퍼의 차기작 중 한 편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이미 호흡을 맞췄던 제니퍼 로렌스와 함께 하는 <세레나>다. <세레나>는 <인 어 베러 월드>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수잔 비에르 감독과 할리우드의 세대교체 선두주자로 손꼽히고 있는 제니퍼 로렌스의 만남으로 이미 화제가 된 신작. 그는 제니퍼 로렌스가 맡은 거대 벌목회사를 이끄는 여장부 세레나의 남편 조지 역을 맡았다. 세레나가 자신의 불임 사실을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부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그는 다섯 편의 영화를 추천하며 말미에 “늘 베스트는 변한다”고 덧붙였다. 마치 자신의 최고작 또한 거듭해서 변할 것이라는 걸 예고하는 듯. 물론 미남에서 ‘찌질남’으로 그리고 대체불가능한 배우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브래들리 쿠퍼의 예고편은 오래 두고 지켜볼 만할 것이다.
‘라이프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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