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이정현의 얼굴이 이렇게 말갰던가.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을 보는 내내 이 질문을 떠올렸다. 13년 전 버리고 떠난 아들 지구(서영주) 앞에서 최대한 엄마다운 의젓함을 보이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미성숙함을 드러내고야 마는 미혼모 효승은 이정현의 맨얼굴을 바탕으로 그려진 인물이었다. 어떠한 색조 화장도, 어떠한 콘셉트도 덧입지 않은 그의 말간 모습은 어느 때보다 인상적인 자국을 남겼다. 실제로 만난 이정현 역시 영화 속 효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기에 걸린 건 괜찮냐고 묻자, 옅은 메이크업을 한 얼굴로 “이젠 괜찮아요. 많이 나아졌어요”라며 작게 웃는다. 그렇게 미소를 띤 표정도 너무나 산뜻해서 ‘이정현의 맨얼굴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잊고 살았다’는 말을 건넸더니, 이목구비엔 다시금 옅은 웃음이 번진다. 무엇도 덧칠하지 않은 그 얼굴처럼, 이정현의 말 속에도 불필요한 치장은 없다. 오로지 진심뿐이다. “감독님이 <파란만장>을 보시고선 저한테 연락하셨어요. 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대요. 문제는 효승 역이 미혼모인데다, 노개런티였던 거죠. 처음에는 거절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사회적으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니까, 함께 해보자고 하시면서 다큐멘터리를 한 편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그 작품이 마음을 움직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예요.”



힘들게 뗀 첫걸음만큼 과정도 쉽진 않았다. 내내 애교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분노를 폭발시키는 효승의 감정을 따라잡기란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철 모르는 아이처럼 자라버린 마음과 아들을 품어주는 엄마의 마음을 수시로 오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효승이 되기 위해 이정현이 선택한 방법은 그냥 현장을 믿는 것이었다. “일부러 미혼모들이 처해있는 상황만 인식한 채로 현장에 갔어요.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기 위해서 현장에 집중한 거죠. 사실 저도 이렇게 일상 언어로 된 대사를 영화에서 보여 드리는 건 처음이라, 좀 더 힘들었어요.” 그제야 머릿속을 헤집어 이정현의 모습을 돌이켜보니, <꽃잎>과 <하피> 등 광기 어린 역할들이 대부분이다. 늘 “공포 영화나 광적인 역할만 들어왔던” 그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박찬욱, 박찬경 감독 형제의 <파란만장>이었다. 굿을 통해 접신하는 무당 역이었지만, “항상 연기에 갈증이 나 있었”던 이정현의 마음을 채워주기엔 충분했다. “전 일부러 연기를 안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너무 출연을 안 하니까 다들 하기 싫어서 그랬는 줄 아시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파란만장>을 찍고 나니까 다들 ‘아, 이제 이정현이 영화를 하는구나’ 하고 연락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감독님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렇게 다시 연기의 맛을 보게 된 이정현이 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을 추천했다.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1. <올드보이> (Oldboy)
2003년 | 박찬욱

“박찬욱 감독님이 만드신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올드보이>는 단연 최고의 명작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봐도 너무 세련됐고, 미장센마다 스토리나 연출, 세트, 연기, 의상 모두 한마디로 끝내주죠. 특히 주인공인 오대수(최민식)가 마치 그리스도 기도문을 외우듯 내뱉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내레이션 대사가 너무나 멋져요. 영화 음악으로 사용된 ‘Cries and whispers’와 ‘Last waltz’도 어쩌면 이렇게 작품에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있을까 싶고요. 100년이 넘도록 영원히 명작으로 남을 것 같아요.”



거듭되는 복수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 것은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군만두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오대수의 모습, 소년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 이우진(유지태), 그리고 하얀 눈밭 위에서 미도(강혜정)와 껴안은 오대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엔딩. 작품은 제57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영화지 토탈필름 선정 ‘역대 최고 영화 톱 50’에서 10위를 차지했다.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2.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2002년 | 대런 아로노프스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존재감을 제 심장에 못 박아버린 영화예요. 마약의 위험성을 드라마틱하고 심미적으로 묘사한 작품인데, 악몽을 그린 듯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어요. 보는 내내 가위에 눌린 듯 미치도록 답답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게끔 하더라고요. 남녀 주인공보다는 사라 골드파브(엘렌 버스틴)의 심리 묘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TV쇼 출연을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시도하다 약물에 중독되는 인물이에요. 인간의 쓸데없는 욕구와 욕망을 극단적인 영상으로 보여주더라고요.”



다이어트 약에 중독된 사라, 사라의 아들인 마약상 해리(자레드 레토),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동료 타이론(말론 웨이언스). 네 명의 마약 중독자들은 몇 개월에 걸쳐 서서히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작품은 수많은 컷을 만들고, 자르고, 오려 붙여 이들의 이야기를 몽환적인 이미지로 치환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특유의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3. <블랙 스완> (Black Swan)
2011년 | 대런 아로노프스키
“<레퀴엠> 속 사라 골드파브의 세련된 연장선이 <블랙 스완>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정한 심리가 영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레퀴엠>과 일치하되 조금 더 세련돼진 거죠.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주인공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모든 경쟁자를 경계해요. 제가 여배우의 입장에 있어서 그런지 그 심리가 완벽하게 이해되더라고요. 보는 내내 니나와 한 몸이 되는 것 같았어요. 음악과 영상의 조화도 기가 막혀요. 음악 감독이 클린트 멘셀이라는 분인데, 내년 개봉 예정인 박찬욱 감독님의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의 음악도 이 분이 맡는다고 하더라고요.”



광기에 사로잡힌 열정은 예술가를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가. 흠잡을 곳 없는 백조 연기를 선보이는 니나지만, 관능미가 필요한 흑조 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누가 봐도 매혹적인 릴리(밀라 쿠니스)에 대한 질투로 서서히 망가져간다. 니나가 “I was perfect”라 말하며 무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엔딩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4.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
2001년 | 데이빗 린치
“상상 속 인물을 만들어서 반전에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적 설명이 불친절하고 헷갈리기도 해서, 저는 각 시퀀스의 의미를 찾기 위해 다섯 번 이상 본 것 같아요. 다이아나(나오미 왓츠)는 상상 속에서 할리우드를 꿈꾸는 순수한 배우지망생인 베티, 그리고 살인범에게서 탈출한 여성 리타(로라 해링)를 만들어 내요. 여배우의 욕망과 질투, 자극적인 성적 망상이 매력적이고, 그 상대 인물을 섹시하고 고혹적인 리타로 묘사한 것도 재미있었어요.”



이 영화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등장인물들과 각종 표식들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넘나들며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간의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발현되는지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 2001년 열린 제54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5. <파이트 클럽> (Fight Club)
1999년 | 데이빗 핀처
“데이빗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 역시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상상 속 인물을 만들어내는 작품이에요. 폭력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죠. 싸우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처음엔 눈을 찌푸리며 봤지만, 단순한 내용이 아니더라고요. 각 파트마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메시지가 존재해요. 특히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자동차 회사의 직원인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출장행 비행기에서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을 만난다. 두 사람은 ‘파이트 클럽’을 결성하지만, 대도시의 카드 회사 빌딩들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우는 테일러와 말리려는 주인공은 마침내 대립하게 된다. 침울하고 음산한 분위기 속에 사회 풍자가 묻어나는 작품으로, 원작은 척 팔라닉의 소설이다.

이정현│떨쳐버릴 수 없는 영화들


여전히 이정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꽃잎>, 그리고 ‘와’ 혹은 ‘바꿔’에 머물러있다. 중국에서는 아시아 인기 대상을 받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며, 음반은 거의 쉼 없이 발표해왔지만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이정현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덤덤할 뿐이다. “그냥 저만 열심히 하면 되지, ‘나 이런 거 하고 있어요’라고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아실 분들은 많이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이렇듯 조용히, 다부지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의 다음 목적지는 김한민 감독의 <명량-회오리바다>와 내년 발매 예정인 댄스 앨범이다. 연기와 음악, 두 가지 모두를 꾸준히 이어나가는 힘에 대해 이정현은 단순하지만 뚜렷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영화할 땐 배우 이정현, 음악할 땐 가수 이정현. 그것만 갖고 있으면 돼요.” 화장기가 희미한 그의 얼굴만큼이나 속이 다 들여다보이도록 맑은 대답. 여러모로 이정현은, 참 예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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