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혼란스러웠던 한 해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뀌는 사이, 드라마계도 조용하지만 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출범 당시만 해도 거대한 괴물로만 치부됐던 종합편성채널이 JTBC <아내의 자격>과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와 같은 날카로운 작품들을 방영했다. 그동안 마니아 드라마를 생산해냈던 케이블은 tvN <응답하라 1997>이라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사랑스러운 드라마로 지상파를 위협했다. 그래서 올해를 정리해보는 것은 드라마계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지도 모른다. <텐아시아>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작품과 인물, 내년에는 제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올해의 ‘노땡큐’ 순간들, 시상식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훈훈한 ‘대한민국 세종봉황충정로 어워즈’를 준비했다.

2012 텐어워즈│삶도 드라마도 퍽퍽하기만 했던 2012년
2012년 드라마에 해피엔딩은 없었다. 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려던 아버지는 결국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현명한 며느리도 끝내 고부갈등을 해결하진 못했다. 달콤한 판타지 대신 고달픈 현실이 드라마를 채운 2012년, 그 중심에는 “그 어떤 공포물보다 무서웠고 그 어떤 문화기술지보다 흥미로웠던”(김희주) JTBC <아내의 자격>이 있다. “종편에서 방영되어 더 많은 대중에게 노출될 기회를 갖지 못한 걸 제외하면 단점을 찾기 힘든”(윤이나) 드라마이자 <텐아시아>가 선정한 올해의 작품인 <아내의 자격>은 “일회적이지 않은 주제의식을 전달한 내공”(윤희성)을 바탕으로 대치동의 유일한 부적응자이자 을이었던 서래(김희애)가 떠난 직후 드러난 ‘이 동네’의 추악한 맨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내의 자격>뿐만이 아니다. SBS <추적자>는 거대한 권력 앞에, MBC <골든타임>은 쉽게 바뀌지 않는 시스템 앞에,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이하 <우결수>)는 수월한 결혼 준비를 가로막는 양가의 경제적 차이 앞에 무릎 꿇은 개인의 좌절을 담아냈다. 세 작품은 소재의 현실성에 안주하지 않고 주인공에게 소박한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 퍽퍽한 현실을 치열하게 그려내며 시청률과 작품성 면에서 모두 성과를 거뒀다. 특히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당>)의 박지은 작가와 함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추적자>의 박경수 작가는 “‘슈퍼 갑’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들을 위한 대한민국 현실 안내서”(최지은) 역할은 물론 “딸과 아내를 잃은 백홍석의 이야기로 시작해 이 작품을 보는 우리 모두를 주인공으로”(한여울) 만들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판타지 대신 퍽퍽한 현실이 자리 잡은 2012년의 드라마

이미숙은 연륜과 내공으로 드라마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고, 송중기는 자신의 매력으로 드라마를 힘겹게 견인했다.
이미숙은 연륜과 내공으로 드라마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고, 송중기는 자신의 매력으로 드라마를 힘겹게 견인했다.
그래서 올해의 배우로 이미숙이 거론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새빨간 립스틱에 파란 눈화장을 한 <우결수>의 들자는 이미숙을 만나 “억척스럽지만 사랑스럽고 속물이지만 돈 앞에 비굴하지 않은”(황효진) 어머니이자 “삶의 악다구니 속에 있는 철학을 보여주는”(강명석) 서민의 얼굴을 완성했다. 배우가 쌓아 온 연륜과 내공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드라마를 만든다. “갑인 동시에 을, 강자인 동시에 약자, 비열한 살인자인 동시에 유능한 정치가인 강동윤의 욕망과 딜레마가 배우 김상중을 통해 완성”(최지은)되고, “얼굴 근육의 씰룩임 하나만으로 다 표현해내는”(이승한) 배우 박근형이 정재계를 주무르는 ‘슈퍼갑’부터 “끝내 혼자일 수밖에 없던 쓸쓸한 노인”(조지영)을 아우르는 서 회장 그 자체였던 것처럼.



최소한의 판타지마저 걷어낸 드라마의 시대. 신데렐라를 구해 줄 재벌 2세와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순정남이 등장하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KBS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이하 <착한남자>)는 인물의 욕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끝없는 고난 속으로 주인공을 몰아세웠고, SBS <패션왕>은 김기호 작가의 전작 <발리에서 생긴 일>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착한남자>의 송중기는 “유망주가 믿음직한 배우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 무너져가는 드라마를 홀로 막아서는 ‘네덜란드 소년’ 임무를 무사히 완수”(김희주)했고, <패션왕>의 유아인과 이제훈도 자신의 매력으로 캐릭터를 설득시키며 작품을 이끌어갔다. 스스로 빛을 만드는 청춘스타의 등장은 그 자체로 환영할 일이지만, 배우만 화제가 되는 드라마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 드라마가 정체기를 맞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장동건-김하늘이라는 스타캐스팅과 김은숙이라는 스타작가가 손을 잡았음에도 SBS <신사의 품격>이 <시크릿 가든>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새로 발굴된 생존비기의 불편한 진실

케이블과 종편의 신선한 기획과 냉철한 통찰력은 드라마계의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케이블과 종편의 신선한 기획과 냉철한 통찰력은 드라마계의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이성의 잣대로 현재를 들여다보는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하는 사이, 예능 PD 출신의 신원호 감독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감수성의 영역을 건드렸다. tvN <응답하라 1997>는 “한국 드라마 판에 아직도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최지은)한 반가운 드라마다. 물론 상반기 흥행작이었던 MBC <해를 품은 달>과 영화 <건축학개론>이 이미 복고와 첫사랑 코드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응답하라 1997>이 아주 새로운 드라마라고 얘기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신원호 감독이 거의 만장일치 수준으로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된 건, “시대의 감수성을 반 박자 빨리 읽은 기획, 참신한 캐스팅의 모험, 클리셰와 파격 사이를 넘나들었던 시도”를 통해 단순히 추억의 아이템이 아니라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리 모두의 순수했던 시절”(이가온)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넝쿨당> 역시 “출생의 비밀, 보수적인 시댁과 알파걸 며느리, 정체를 숨긴 실장님”(이승한) 등의 전통적인 소재를 피하지 않고 이야기의 관점을 비틀었다. 덕분에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가 “1년 내내 ‘시월드’를 이야기”(이경진)했다. 두 작품이 알려준 ‘레드오션에서 살아남는 법’은 두 가지다. 기존의 것을 다르게 보거나, 깊이 파고들거나.



그러나 그 생존비기의 발굴이 지상파의 공이 아니었다는 불편한 진실. <텐아시아>가 선정한 올해의 작품과 배우는 종편에서, 감독은 케이블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드라마계의 조용하지만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50편 이상의 드라마를 만들었지만 그 중 수작은 손에 꼽히는 지상파에 비해, 케이블과 종편은 각각 신선한 기획과 냉철한 통찰력으로 대중들의 니즈를 충족시켰다. 이제 지상파는 규모만으로 승부하기 어렵고, 과거 명작을 탄생시킨 작가는 더 이상 그 힘을 유지하지 못하며,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드라마는 톱스타의 인지도와 매력만으로 버텨내기 힘들다. 돌파구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추적자>는 “보류해 둔 아이템”(김영섭 CP)이었고, 스타 없이 출발했다. 그러나 주연 배우들은 제작발표회에서 “딱 1~2회만 보면 끝까지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고, 결국 그 말은 사실이 됐다. 어디에서든 희망을 찾아야 한다면 <추적자>가 작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12 텐어워즈│삶도 드라마도 퍽퍽하기만 했던 2012년
그밖의 의견: 올해의 작품
SBS <추적자>
윤리, 법과 사회, 정치, 경제, 한국 근현대사 등 사회탐구영역이 이 드라마 한 편에 통째로 담겼다. ‘슈퍼 갑’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들을 위한 대한민국 현실 안내서. (최지은)

MBC <골든타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들고, 한국의 조직사회를 정조준하는 메스를 댄다. (조지영)
배우 한 명이 아닌 조직과 시스템 전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새로운 직장 드라마. 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언 또는 경고. (강명석)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
출생의 비밀, 불륜과 신데렐라 서사, 보수적인 시댁과 알파걸 며느리, 정체를 숨긴 실장님 같은 소재로도 막장이나 자기 복제 없는 홈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귀여운 장르선언. (이승한)
갈등이 있는 문제적 현실의 한 부분을 그대로 뜨지 않고 그것이 매력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지점들을 찾아냈고, 이를 통해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으면서 의미 있는 각인을 이뤄냈다. (이경진)
관점은 새롭게, 표현은 디테일하게 담아낸 작품. 세대를 막론하고 화제가 된 주말극은 실로 오랜만이다. (이가온)



그밖의 의견: 올해의 감독
MBC <골든타임>의 권석장-이윤정 감독
시스템과 그 안의 인간을 함께 볼 줄 아는 드라마였다. 병원 밖에서도 이어지는 개인의 삶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연출의 힘. (윤이나)
사회극으로서 메디컬드라마의 지평을 확장한 작품. 그 중심에 노동자로서의 의사, 노동현장 같은 수술실 등 메디컬드라마의 익숙한 풍경을 새로운 관점으로 연출한 권석장 감독의 힘이 있었다. (김선영)
병동의 긴박함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담아내는 카메라워크, 악역조차 이해할 여지를 남겨두는 연기지도, 인물의 감정을 담는 시선의 여백까지. 서사와 캐릭터 모두를 잡았다. (이승한)

JTBC <아내의 자격>의 안판석 감독
연출자를 드러내지 않는 연출. 하지만 우리는 안판석 감독의 안내에 따라 대치동과 일정 거리를 둔 관찰자가 된다. (강명석)

그밖의 의견: 올해의 작가
JTBC <아내의 자격>의 정성주 작가
지금은 거의 찾아보게 힘들게 된 드라마 작가의 내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오로지 치열함만이 헐겁지 않은 드라마를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이지혜)
계급에 대한 통찰과 그것을 개인의 파멸로 구체화 하는 필력은 문학적일 정도로 정교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섬세하게 분석된 시댁, 실감나게 관찰된 중산층이 있었던가. (윤희성)
펜이 아니라 송곳으로 써내려간 ‘작가’의 귀환. (김희주)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하명희 작가
드라마 한 회 분량에 그쳤을 수도 있는 청춘남녀의 결혼준비과정에 현미경을 들이대 상견례부터 혼수 준비까지 꼼꼼하되 지루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냈다. (이가온)

SBS <옥탑방 왕세자>의 이희명 작가
20세기의 트렌디 드라마에서 건너온 작가는 21세기에도 건재함을 증명했다. 비록 결말까지 가는 길은 종종 헝클어졌으나, 가장 순수한 멜로의 영역만큼은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황효진)

SBS <유령>의 김은희 작가
한국드라마에 실종된 이성과 논리 및 추리가 끝까지 의젓하게 버티고 있었던 드라마. (조지영)

그밖의 의견: 올해의 배우
MBC <골든타임> 이성민
연기를 잘한 배우는 많았지만 한 드라마 장르사에 길이 남을 독보적 캐릭터를 완성한 배우는 이성민이 유일했다. (김선영)
특별한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퍽퍽한 삶을 대변하며 대한민국 직장인을 끌어안는 힘을 보여줬다. 축 처진 어깨만으로도 감정 연기가 가능한 드문 배우. (이가온)

SBS <추적자> 손현주
손현주가 좋은 배우라는 것을 몰랐던 이들은 없었을 터. 그러나 그는 <추적자>로 좋은 배우를 넘어 한 작품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지혜)



SBS <추적자> 박근형
서회장의 다양한 얼굴들을 얼굴 근육의 씰룩임 하나만으로도 다 표현해내는 연기의 한 경지. 경의를 바친다. (이승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극의 긴장감이 요동쳤다. 주름과 숨소리마저 연기를 하는 어떤 경지는 가히 표정의 스펙터클. (조지영)



SBS <추적자> 김상중
갑인 동시에 을, 강자인 동시에 약자, 비열한 살인자인 동시에 유능한 정치가인 강동윤의 욕망과 딜레마는 김상중을 통해 완성되었다. (최지은)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 김남주
박지은 작가와의 콤비 브랜드를 잃지 않으면서도 길고 넓은 작품의 중심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 (윤희성)



JTBC <아내의 자격> 장현성
이성민이나 이희준처럼 나름 ‘훈남’의 이미지로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밉상 진상 꼴배기 싫은 니가 대장’이라 불릴만한 한상진 역으로 자신이 가진 지적인 이미지를 비틀며 속물의 아이콘이 된 그를 올해의 배우로 꼽겠다. (장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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