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가 긴장했다. 주어와 서술어의 조합이 어쩐지 어색하다. 하지만 6개월 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SBS (이하 ) 첫 방송에서 장기하는 분명, 긴장했다. “저도 안 떨 줄 알았어요. 물론 제 프로그램을 맡은 건 처음이지만 대타 DJ를 많이 해봤고 그때도 별로 안 떨었거든요. 그냥 담담하게 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온 에어’ 불이 딱 들어오니까 호흡 조절이 안 되더군요. 첫 날은 집에 가면서 되게 절망을 많이 했어요. 큰일 났다 싶었죠.”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그때의 장기하는 없다. 그는 특유의 담담하다 못해 무심한 듯한 말투로 툭툭 위트와 센스를 채워 넣은 멘트를 던지는 능숙한 DJ가 되었다. MBC 를 들으며 자란 라디오 키드로서 DJ는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일이었던 동시에 감히 생각도 못 한 일이기도 했다. “장기하와 얼굴들로 알려진 뒤 제의를 종종 받았지만 방송을 막 시작한 입장이고 당시에는 서른도 안 된 제가 DJ를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배철수 선배님처럼 인격이 완벽하고 완성된 사람이어야 DJ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몇 번을 고사하던 DJ 직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선배님도 처음부터 잘하시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실수하거나 못 하는 걸 두려워 말고 해봐야지 배우고 느는 게 아닐까, 할 수 있을 때 뭐든 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무렵 딱 제의가 왔죠.”
하지만 매일 밤 10시부터 두 시간씩 스튜디오를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없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도 없는, 일종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 술자리를 즐기는 장기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직까지는 좋은 게 더 많아요. 술에 대한 리스펙트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입장이지만 술이라는 게 마실 때는 좋지만 깨고 나면 우울하고 살도 찌고 안 좋은 점도 많아요. 자연스럽게 술을 줄이게 되니까 사람이 좀 건강해지고 좋더라고요. (웃음)” 확실히 라디오 DJ는 지금 장기하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비단 몸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덜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뮤지션이라는 게 무대에 있을 때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활동 끝나고 주로 집에 있을 때는 쉽게 우울해져요. 내가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기회가 없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면 좀 우울해지는데 DJ를 하면 사연 보내주는 사람도 있고 신청곡이나 제 생각을 들려드리기도 하니까 오늘 하루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웃음)”
지금 장기하는 라디오를 통해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가는 청취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이라는 특별한 영역만이 아닌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접하고 있다. 이 경험들이 어딘가 엉뚱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생활 감각이 녹아 있는 의 음악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하며 DJ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장기하가 고른 영화들은 그를 닮아, 고유한 매력으로 충만한 작품들이다.
1. (Factory Girl)
2007년 | 조지 하이켄루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실제 에디 세드윅의 삶 자체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그녀를 연기한 배우 시에나 밀러도 정말 매력적이었죠. 극 중에서 사람들이 그녀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들도 정말 좋았고요.”
은 예술의 정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모던 아트의 대표적 작가 앤디 워홀, 그리고 그의 뮤즈로 알려진 에디 세드윅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한 사교 파티에서 오드리 헵번을 꿈꾸며 뉴욕으로 건너온 에디 세드윅(시에나 밀러)을 발견한다. 첫눈에 그녀가 자신의 뮤즈임을 직감한 앤디 워홀은 에디 세드윅을 자신의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한다. 금발의 숏 컷 헤어스타일과 강렬한 아이 메이크업 등 실제 에디 세드윅을 훌륭하게 재현한 시에나 밀러의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
2. (Searching for Sugar Man)
2012년 | 말릭 벤젤룰
“일단 좋은 음악을 알게 되어서 되게 좋았어요.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서 그 인기를 얻은 게 납득이 되더라고요. 사실 예전에 클럽 공연만 하고 방송 활동 같은 건 기대도 안 했던 때랑 지금을 놓고 봤을 때 다른 것 중 하나가 과연 진짜 좋은 음악은 결국엔 인정받는가에 대한 믿음이에요. 제 믿음 중 하나였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 자주 오더라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내가 생각했던 게 맞는구나 하는 걸 다시 깨닫게 해줘서 고마웠던 영화예요.”
1970년대 디트로이트 출신의 포크 록커 시스토 로드리게즈는 소울 충만한 멜로디와 명상적인 가사를 담은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지만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로드리게즈는 자살설을 비롯한 루머 속에서 세상에 잊힌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우연히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흘러들어 간 그의 음반이 당시 인종과 정치 문제로 반체제적 혁명의 기운이 들끓던 그 땅의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강하게 위로했다.
3. (Glasses)
2007년 | 오기가미 나오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가 저랑 잘 맞아요. 우리 밴드 노래 중에도 ‘느리게 걷자’ 라는 곡도 있지만 원래 뭐든 빨리빨리 하거나 동시에 여러 개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느리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앨범 활동이나 공연도 할 때는 신나지만 몇 달 하다 보면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쉬어야 하는 순간들이 와요. 말도 되게 느리고 곡 만드는 것도 그렇고 뭐든 좀 느린 편이라 멍 때리고 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정서가 저랑 확 통하는 영화여서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무엇을 하고 있나요?” “명상이요.” 한적한 바다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파도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휴대 전화가 터지지 않으니 방해할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바닷가에 모여 기이한 체조를 하는 좀 이상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으로 일본발 힐링 무비 붐을 일으킨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만든 역시 눈을 정화시키는 풍경과 위를 자극하는 맛난 음식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4. (The Dark Knight)
2008년 | 크리스토퍼 놀란
“배트맨 시리즈는 마이클 키튼이랑 잭 니콜슨이 나오는 옛날 시리즈부터 좋아했어요. 원래 좋아하는 배트맨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니까 그의 3부작을 다 봤어요. 그중에서도 역시 최고는 . 히스 레저의 조커가 있는 2부을 1, 3부가 당해낼 수 없더군요. 히스 레저의 조커는 차원이 다른 세계인 것 같아요. 전무후무하고 정말 섹시하죠.”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그리고 ‘히스 레저의 조커’. 여러 감독과 많은 배우들이 거쳐 간 시리즈지만 그 역사 속에서도 크리스토퍼 놀란과 히스 레저는 특별한 의미로 남게 될 듯하다. 고담시를 끝장내려는 조커(히스 레저)는 광기 어린 행각으로 시민들을 두려움에 빠트리고,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은 고담을 구하기 위해 정체를 밝혀야 할 위기에 빠진다. 너무 젊은 나이에 떠난 히스 레저의 아까운 재능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5. (Black Swan)
2011년 | 대런 아로노프스키
“이 영화는 환각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 경계가 완전히 뚜렷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어떤 장면은 실제로 경험을 한 걸까 아니면 명백히 환각일 뿐인 걸까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게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잖아요. 영화나 음악이나 경계가 분명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작품들은 약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애매모호하게 그 교집합이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우아한 관능미가 있어요. 그냥 우아하기만 한 것도 별로고 싼 티 나게 관능적인 것도 별로고 우아한 관능을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영화에는 그게 있어요.”
어떤 예술은 광기를 먹이 삼아 성장한다. 뉴욕 발레단의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우아한 백조 연기에 있어 최고로 손꼽히지만 흑조 연기는 어딘가 부족하단 평을 받고, 완벽주의자인 니나에게 이는 시련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새로 입단한 릴리(밀라 쿠니스)가 테크닉은 떨어지지만 압도적인 관능으로 흑조를 연기하자 니나의 불안은 더욱 가속된다.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라디오는 청취자와 유사 가족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DJ에게 기대되는 역량에는 비단 음악 선곡과 진행만이 아니라 청취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포함된다. 그간 장기하의 이미지를 놓고 생각해 보면 때로는 오글거리는 멘트도 서슴지 말아야 하는 이 역할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의외로 잘 해내고 있다. “실제로 오글거리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친해지면 금방 장난도 잘 치고 애교도 잘 부리는 성격이에요. 마음을 쉽게 확 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낯을 가리고 수줍어서 말 못 하는 성격도 아니라 크게 문제는 없어요.” 첫 방송이 시작된 4월 30일 이후 반년이 지났다. “청취율이 안 나오더라도 이 코너는 보존해줘야 한다”는 다짐을 받고 시작했던 ‘양평 LP바’ 같은 코너도 기대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제 긴장한 어깨로 시작했던 워밍업은 끝났다. 앞으로 그는 라디오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을까. “지금까지는 기본적인 것을 연마하는 기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기초는 어느 정도 다져진 것 같고 뭔가 변칙적인 걸 해보고 싶어요. 저는 음악도 듣는 거든 만드는 거든 무난한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어? 이거 뭐지? 하는 게 하나라도 있어야 좋아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되게 웃기고 이상한 걸 한번 해보고 싶어요.”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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