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내 딸 서영이> 천호진씨에게
KBS 주말 드라마 . 제목이 말해주듯 아버지 이야기가 극의 배경을 이루는 드라마, 참 오랜만입니다. 과장을 살짝 보태자면 MBC 나 KBS 이후 아예 볼 수 없지 않았나요? 의사며 법조인 같은 전문직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거나 한쪽 가정은 상류층인 반면 한쪽은 옥탑방에 거주하는 빈곤한 가정이라거나, KBS 주말극의 정석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은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관심이 어디에요. 고맙고 반가운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부모는 젊은이들에게 거추장스럽기만 한 존재가 됐죠. 자식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든지 아니면 원치 않는 결혼을 부추기든지, 그게 부모 역할의 전부인 경우가 태반이잖아요. 물론 에서도 호정(최윤영)과 호정 엄마(송옥숙)가 종종 결혼을 두고 옥신각신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호정이가 워낙 귀여우니까 호감어린 눈길을 보내게 돼요.
사람 좋은 삼재 씨가 하루아침에 못된 아버지가 되고 말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한때 겪어야 했던 IMF라는 전쟁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들, 그로 인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수많은 가정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더군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 좋은 이삼재(천호진) 씨는 IMF 때문에 하루아침에 못된 아버지, 못된 남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겁이 나서 아내에게 책임을 죄다 떠넘긴 채 도망을 치시진 않았을 거예요. 지금 우리로서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벼랑 끝으로 몰려 보지 않은 이상 그 의중을 어찌 짐작하겠어요. 그러나 무책임한 도피 행각의 피해를 가족들은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했죠. 돈이 없어서 하는 고생은 차차 시간이, 그리고 노력이 해결해나갈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세월이 지난 뒤 옛날 얘기하며 웃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요.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건 다른 문제라고 봐요. 어려움 속에서도 격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아등바등 애를 써온 서영(이보영)으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인 겁니다.
사실 처음엔 혈혈단신임에도 피나는 노력 끝에 판사라는 직업,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성공을 이뤄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배우자를 맞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서영이가 왜 그리 아버지의 과오를 향해 여전히 날을 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왜 너그러움을 보여주지 못하는지, 왜 과거사를 훌훌 털어내지 못하는지, 어찌나 야멸찬 지 잘난 것들은 꼭 티를 낸다니까 하고 내심 눈을 흘기기도 했답니다. 이젠 세상사는 이치를 알만한 나이거늘 아버지 꼴이 보기 싫다고 굳이 아무 잘못 없는 쌍둥이 남동생 상우(박해진)와도 절연할 필요가 있나 싶었죠. 듣자니 어릴 적엔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아니었다죠? 오히려 아버지 소리만 나면 반색을 하며 달려들던 딸이었다고요. 그런데 이번 주 방송을 보니 역시나 서영이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들이 참 많았더군요. 그것도 한참 예민할 사춘기 나이에 말이죠. 주인공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악질 교사, 그리고 경쟁 구도를 이루는 반 친구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철없는 만행, 빤한 전개이긴 해도 저 또한 속이 뒤집어져 혼이 났어요. 상우 등록금 때문에 자퇴까지 했느냐는 어머니의 다그침에 “아버지 때문에 자퇴한 거야”라고 싸늘히 답하던 서영이. 얼마나 미움이 사무쳤으면 그랬겠습니까.
서영이의 꽁꽁 언 마음도 언젠가는 풀릴 거예요
그리하여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그래서 시어머니가 아버지 제사상을 차려주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서영이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아마 본인의 속도 속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요,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마련인 거 아시죠? 그 결과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파란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이를 어째요. 그녀의 시누이 미경(박정아)과 남동생 상우가 연인 사이가 되었거든요. 지난번에 만나 보셨죠? 삼재 씨가 마음에 들어 하시던 그 처자가 바로 사위 우재(이상윤)의 여동생이에요. 시어머니 차 여사(김혜옥)가 얼마나 소란을 피워댈지, 이 사태가 어떻게 수습이 되긴 할지 벌써부터 갑갑하기만 합니다. 분명 평탄했던 자신의 삶에 뛰어들어 또 한 번 풍파를 일으키는 아버지와 동생을 향해 원망을 퍼붓게 되지 싶은데요. 삼재 씨, 당장은 서운한 마음이 크시겠지만 부디 이왕 참으신 거 또 한 번만 참아주세요. 서영이의 꽁꽁 얼어있는 그 마음, 언젠가는 꼭 풀릴 거거든요. 제가 자식도 부모도 되어 봐서 잘 압니다. 자식 낳아 한참 길러봐야 부모 속을 안다는 옛말, 괜한 소리가 아니잖아요.
정석희 드림.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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