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은 제목과 달리 사랑에 관한 말랑말랑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데 서툰 사람들의 이야기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에스코트 걸 아키코(타카나시 린)에겐 가족을 대면할 용기가 없고, 은퇴한 노교수 타카시(오쿠노 타다시)는 아키코의 보호자처럼 행동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한편 아키코의 남자친구인 노리아키(카세 료)는 그녀를 향해 과도한 집착증을 보인다. 여자친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그가 있는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 바닥의 타일 개수까지 세어보게 하는 이 남자는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던 카세 료의 얼굴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겹쳐 올린다. 다음은 “작품에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해석으로 노리아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카세 료의 이야기다. 자신의 말이 한국어로 통역되는 동안에도 질문한 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었다.“을 위해 두 번의 오디션을 봤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님께서 내가 배우인 걸 모르시는 상태로 오디션을 봤다. 첫 번째 오디션 때는 15분을 줄 테니 대본을 읽어달라고 하셔서 타카시 역을 맡으신 오쿠노 타다시 씨와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두 번째 오디션 때는 면접처럼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감독님께서 계속 농담을 하셨던 기억이 있다. (웃음) 캐스팅된 후엔 도쿄국제영화제에 가서 감독님의 제자 분이 만든 영화를 봤는데, 감독님이 보시는 내내 “이 컷은 필요 없어”, “이 컷은 좋아”, “이 배우의 이런 부분은 좋아” 등의 말씀을 해주셔서 많은 걸 배웠다.
“노리아키는 나와도 닮은 인물”
노리아키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솔직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공간에 갇혀있는 다카시나 아키코와는 달리, 인간관계를 맞을 때도 직구를 던질 것 같은 스타일이다. 상대방과 마주 보는 식으로 살아가는 타입의 사람이랄까. 일할 때도 본인이 납득하면서 단계를 하나씩 밟아갈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이 나와도 닮았다고 느꼈다.
“외국에서 다시 살아보고 싶진 않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미국에 가서 일곱 살 때까지 살았고, 현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왔을 때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오히려 소외를 당하면서 외톨이로 지낸 적도 있다. 성이 ‘카세’라서 ‘카세이징’(일본어로 ‘화성인’이라는 뜻)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고. 어린 시절 내내 전학도 많이 다녔기 때문에 일본에 적응하는 데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를 함께 찍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의 구스 반 산트 감독님 등 외국 분들과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을 해봐도 외국에서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웃음)
“홍상수, 봉준호 감독님, 송강호 씨를 좋아한다”
한국 감독님들 중에서는 홍상수·봉준호 감독님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 홍상수 감독님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찌질한 남자들에게는 유독 공감이 되더라. (웃음) 그리고 라는 영화를 찍었을 때 일본에서 봉준호 감독님을 뵀는데, 무엇보다 인상이 굉장히 좋으셔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웃음)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은 한국 배우는 송강호 씨다. 그가 출연한 많은 작품을 봤고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배우다. ‘왜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코믹한 느낌과 진지한 느낌의 기본 균형이 좋은 것 같다. 이창동 감독님의 같은 경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도 송강호 씨의 연기는 어딘가 웃게 되는 코믹한 요소가 있었다. 그렇게 소화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배우의 변화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쿠마키리 카즈요시 감독님의 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많은 영화에 출연하게 됐지만, 감독님께선 내가 계속 유약한 남자를 연기하는 걸 좀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위화감을 느낀다고도 하시더라. 그래서 을 통해 늘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쓸쓸한 남자 역할을 제안해주셨다. 그 다음부터 의 이시하라처럼 폭력적이면서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역할들을 연속으로 맡게 된 것 같다. 우연히 그런 변화가 일어난 거다. 어쨌든 배우는 자신이 변화하기를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안을 받아야지만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직업이니까.
“여전히 나약한 인물들에게 끌린다”
배우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루저 같은 인물들이 갖고 있는 나약함에 좀 끌리는 건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에서도 노리아키는 늘 아키코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그런 유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더욱 집착하지 않나. 그런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배우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자아, 즉 고집은 좀 덜해지는 것 같다. 초기에는 나를 좀 더 앞으로 내세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상대방의 가치관을 더 많은 부분 수용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글. 부산=황효진 기자 seventeen@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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