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새벽 열린 베니스 영화제 시상식, 김기덕 감독의 가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베니스에서 그가 부른 ‘아리랑’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김기덕이 국제무대에서 ‘아리랑’을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세계 다른 영화제에서도 상영 전과 후에 ‘아리랑’을 즐겨 부르곤 했으나 그랑프리를 수상한 지금에서야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왜 아리랑을 부르는지 궁금해 했다. 이 유명세와 관심의 이전 그리고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지난 11일, 수상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듯한 김기덕 감독을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통해 만났다. 자신의 손을 떠나 세상에 띄워 보내려는 와 함께 그가 전하는 당부와 바람도 들었다.드디어 그랑프리다.
김기덕: 좋은 일이다. 90년대부터 한국의 좋은 영화들이 국제무대에 꾸준히 소개됐지 않나. 많은 성과를 거둬왔고, 관객들의 관심도 모아왔다. 그동안의 모든 것이 누적되어 이 상을 낳은 거라 생각한다. 내가 받았지만, 실은 한국 영화계에 주어진 상이다.
트로피를 받는 순간에 떠오른 사람은 누구였나.
김기덕: 청계천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내 모습이다.
“는 결국 돈이 주인공인 영화” 수상의 기쁨 속에도 여러 결이 있었을 것 같다.
김기덕: 아마 가장 깊이 기뻐하실 분들은 그간 소리 없이 나를 지지해준 내 영화의 관객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점이 정말 뿌듯하고 행복하다. 외국 나가면 꼭 받는 질문이 있다. “당신 영화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고, 유럽이나 러시아에서만 인기가 있는 건가?” 그러면 나는 “한국에도 프랑스, 미국, 러시아만큼 내 영화를 믿어주고 아껴주고 지지해주는 팬들이 있다”고 말해왔다. 진심이다. 감사하다.
수상 직후 ‘아리랑’을 또 불렀다. ‘아리랑’은 김기덕에게 어떤 노래인 건가?
김기덕: 지난 번 상해 영화제에서도 불렀고, 칸느에서 상 받고 난 뒤에도 불렀다. 영화제 때마다 상영 전이나 후에 항상 부른다. ‘아리랑’이 중국 문화재로 유네스코에 등재가 됐는데, 여러 문제들이 얽혀있지만 ‘아리랑’은 결국 부르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부르면 나의, 우리의 ‘아리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불렀다. 베니스 현지에서도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국인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실제 나에게도 그렇다.
상영 전과 후의 베니스 현지 분위기가 궁금했다.
김기덕: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있었다. 그러다 기자시사회에서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 상영에 대해서는 한 기자가 “영화가 끝나자, 산사태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본 상영 후 길거리를 제대로 다니기 힘들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이더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 황금사자상 감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어쩔 수 없이 점점 기분이 들뜨게 되어서, 수상 하루 전날 정말 힘들었다. ‘이러다 상 못 받고 추락하면 어떡하지? 정말 아플 텐데’ 싶어서. 여우주연상에 대해서는 모두들 조민수 씨를 지지하는 쪽에 만장일치 했었다고 들었다. 각본상도 모두 동의해서 에 주려 했다고 하더라. 결국 그랑프리를 받아 둘 다 못 받게 되었지만.
베니스에서 다른 유럽 혹은 서양 문화권의 사람들은 에 드러난 자본주의의 이면과 부조리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같던가?
김기덕: “는 주인공이 세 명인 것 아니냐”, “돈도 주인공이 아니냐” 하는 말을 했다. 조금 놀랐다. 정확히 봤구나 싶었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트러블, 파열, 균열을 담고 있는 것이 다. 결국 돈이 주인공인 영화다.
를 통해 정확히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이면을 그리려 했던 건가.
김기덕: 제작 보고회 등 이전 간담회에서 “는 극단적 자본주의에 대한 영화다”라고 말씀드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외에도 가족, 복수, 믿음 등 다양한 주제들을 깔고 있다. 내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지점은 돈 때문에 가족이, 인간이 파괴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혹은 현실이다. 나에겐 이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돈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 결말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나는 정말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란다.
영화 속에 토끼와 닭, 장어가 등장하고 모두 잔인한 방식으로 죽는다. 의미를 부여한 부분이 있는가.
김기덕: 개인적으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장면이다. 강도가 닭, 토끼, 생선을 스스로 도살을 해서 먹는 캐릭터지 않나. 무엇인가를 죽이고 싶은 심리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고, 강도의 결말을 미리 예고하는 지점도 갖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이 강했다.
김기덕: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다.
“변칙 상영을 하는 영화들이야말로 도둑들” 그러고 보면, 1996년 데뷔작 이후 계속해서 김기덕의 영화가 줄곧 견지해온 시선은 종교적으로든 아니든 ‘구원’이라는 개념과 맥이 통하는 것 같다.
김기덕: 맞다. 구원이라는 말이 사실은 종교적으로 많이 쓰이는 개념이긴 하지만, 나는 우리들의 삶에서 구원의 의미를 이야기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구원의 의미는 종교적으로 죽어서 가는 세계나 살아서 꿈꾸는 환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서로 존중해서 믿음이 확대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열등감으로 자라는 패배자들이 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구원 아닐까. 우리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믿음과 이해와 용서 같은 것들이 구원이라 생각한다.
베니스에 가기 전 수상 공약을 물으니 “다음 영화를 꼭 만들겠습니다”라고 했다.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함의가 있었던 대답이었나.
김기덕: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한들 시장이 없거나, 극장 상영이 안 이루어지면 안되지 않나. 나는 이 상을 타오면 극장에서 극장 관계자와 극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문을 좀 더 넓게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관객들도 이 상을 타오면 극장 관계자들에게 문을 넓게 열어달라고 요구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이 굉장히 중요했고, 만약 이루지 못한다면 이 영화 역시 내 이전의 영화들처럼 초라하게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영화를 만들 이유가 자꾸 줄어들게 되는 거다. 그런 위기감이 담겨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뭐 오라는 나라는 많으니까, 거기 가서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정말 이 한국에서 관객들이 내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거나, 봐 주지 않는다면.
이제까지는 그런 환경 속에 놓였던 게 사실이지만 는 다르지 않을까.
김기덕: 극장이 많지 않아 안타까운 상황이다. 사실 김기덕이 이제껏 멀티플렉스의 폐해를 늘 주장해왔으면서 두 관씩 차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한 관이라도 하루 몇 회 정도 정해진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여기 오기 전에 좌석점유율 사이트에서 봤는데, 의 회차 수가 굉장히 적더라. 같은 영화는 여전히 회차가 1000회, 1500회 이상인데 는 400~500회 정도다. 좌석 점유율은 가 45~65% 정도 된다. 일반적인 극장 상도로 봤을 때 이런 경우 관이나 회차를 확대시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 같다. 점유율 15% 미만인데도 천만 기록을 내기 위해서 여전히 안 빠져 나가고 있는 영화가 있는 것 같다. 난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도둑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나도 이런 말 하는 것이 편하진 않다. 1대1 로 싸워서 지면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니 물러나면 된다. 그런데 그런 경쟁이 아니지 않나. 무수한 편법과 독점 등이 있다. 이런 불리한 게임 속에 있으면 화가 난다.
이제 를 계기로 투자를 받는 부분에 있어서도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투자에 관련한 그간의 소회나 기대, 바람 같은 게 궁금하다.
김기덕: 결국은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그 훈련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메이저 제작사로부터 투자를 받은 것은 딱 한 번이다. 작업할 때 5억. 그 외에는 거의 일본이나 유럽에서 투자를 받거나 아니면 해외 수익금으로 만들었다. 는 1억 2~3천 정도가 들었고, 도 1억 7천 정도가 들었다.
저예산 제작으로 지속 가능한 이유가 따로 있나?
김기덕: 이렇게 제작이 가능한 건 내 힘이 아니다. 이 영화에 참여해주는 배우들과 스태프들 덕분이다. 일단은 개런티가 없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주 열악한 상황의 스태프들만 한 달 생활비 정도의 개런티를 준다. 나머지는 수익이 나면 나누는 구조인데, 는 극장 수입이 10억이 났다. 거기서 5억을 스태프들 개런티로 줬고, 스태프가 20~30명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개인에게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더라. 그렇게 지급한 돈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내가 갖는 것도 아니다. 다음 영화 제작에 나눠 쓰거나 한다. 앞으로 이런 시스템을 정착 시키고 싶다. 도 극장 수입이 난다면 모두 그렇게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
“제도권이 아닌 곳에서 영화하는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그 시스템이란 건 영화가 외부 투자 없이 독립적으로 제작되는 것을 뜻하나?
김기덕: 그렇다. 이것이 앞으로 영화감독과 영화인들이 불평하지 않고 영화를 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카메라도 렌즈 포함 340만원 짜리로 모두 찍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작가가 보는 세계관과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영화들이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다른 영화들과 당당하게 경쟁을 했으면 한다. 가 그런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50억, 100억 단위 규모의 영화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기덕: 이 세계 배급이 된 다음에는 전 세계적으로 투자 제안이 많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엄청난 돈을 대 주겠다는 제안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돈이든 그 돈의 가치를 객관화 할 수 없다면 받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들은 굉장히 많이 있지만 50억이든, 100억이든, 1000억이든 큰 규모의 제작비가 드는 영화라면 그만한 가치를 보여주어야 하고, 그 투자자에게 그만한 가치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란 자신이 들 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김기덕 키드도 생겨나지 않을까.
김기덕: 대학에 영화학과가 많은데 나는 거기 출신이 아닌 사람들,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감독 데뷔를 시키는 걸 하고 싶은 거다. 실제로 지금 준비하는 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들도 모두 열정을 가지고 하는 중이다. 그렇게 제도권이 아닌 곳에서 영화하는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그런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것 같다.
다음 영화에서는 셀러브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특정한 모델이 있나.
김기덕: 내 영화에는 늘 어떤 모델이 없다. 사회가 가진 온도와 느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사회가 배라면 배가 바다에 나가 떠다닐 때 거친 파도에 휩쓸리며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싶은 거다. 앞으로도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를 마쳤고, 상도 받았고, 한 판 벌어진 잔치가 기분 좋게 끝나는 느낌이다.
김기덕: 나에게 는 맛있게 먹은 음식이고, 소화가 됐고, 배설된 똥이라고 생각한다. 이 배설물이 거름이 되어 또 다른 것들을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건 내 몫이 아니다. 그냥 가 가게 되는 길이 있겠지.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이 있는데 극장이 없다면 극장을 요구할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은 상영관이 생겨나면 좋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의 운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를 보내고, 오늘을 마지막 자리로 나는 더 이상 언론에 나가지 않고, 다음 시나리오를 써야한다. 다시 0에서 시작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아, 딱 한 곳에는 나갈 수도 있다. MBC 라디오 에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가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고 다음 영화를 할 것이다.
사진제공. NEW
글. 이경진 인턴기자 romm@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