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가 시작할 당시에만 해도 딸을 잃고 비틀거리는 아비의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깊은 통찰이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결국 딸은 거대권력의 가해자 앞에서 낱낱이 찢겨졌고, 가족은 파멸되었으며,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 홍석(손현주)마저 돈과 권력 앞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배신과 반목의 늪에서 발버둥 친다. 권력과 욕망.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는 더 이상 드라마 안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 산재해있지만, 그 어떤 때보다 를 시청해야 할 이유를 김선영 TV평론가와 최지은 기자가 분석했다. /편집자주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쫓는 자가 있으면 쫓기는 자도 있게 마련이다. SBS 에서 쫓는 자는 일견 딸의 죽음의 배후를 밝히려는 백홍석(손현주)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실에 점점 접근해갈수록 더 숨 가쁘게 쫓기는 것은 오히려 홍석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높고 더 멀리” 있는 권력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를 조종하고 이용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진정한 추적자는 바로 거대권력이다. 요컨대 는 딸을 살해한 진범을 쫓는 아버지의 추적극이라는 표면적 플롯 아래, 어느덧 개개인의 내밀한 삶 속으로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력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깔아 놓은 드라마다.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통제하는 권력 vs <추적자>│불편한 진실을 향한 직구" />권력이 대중을 지배하는 수단은 물리적 폭력에서부터 판옵티콘과 같은 감시 체계까지 점차 은밀하고 심층적이며 전방위적으로 진화되어왔다.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 사찰이 벌어지고 재벌이 골목 상권까지 장악 중인 현재의 한국 사회는 그 진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권력은 사회의 전 분야에 편재되어 있고, 홍석은 그 총체적 감시의 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진실을 폭로하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거대권력에 장악당한 법과 언론에 의해 제지당하며, 마치 CCTV처럼 가는 곳마다 접하게 되는 뉴스 속보와 기자들의 카메라는 권력의 언어만을 “받아쓰기”하며 홍석의 말을 무력화시킨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거대권력이 개인을 철저하게 지배하기 위해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잠식해 그것을 통제하고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홍석의 가정과 사적 관계는 완전히 파괴된다. 수정과 아내 미연(김도연)이 차례로 세상을 뜨고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주인 없는 숟가락 두 개나 그들과의 추억이 어려 있는 집과 가구들마저 경매에 넘어가는 장면은 권력에 의해 폐허가 된 사적 영역의 우울한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믿었던 친구 창민(최준용)과 황 반장(강신일)도 돈을 선택하며 홍석을 배신한다. 권력은 그렇게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지점을 파고들어가 최소한의 존엄마저 파괴함으로써 약자들의 연대를 단절시키며, 관계망이 “다 없어지고 나만 남”은 개체의 상태로 인간을 고립시킨다.
부조리 앞에서 뭘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
그리하여 결국 권력이 원하는 것은 약자들을 무력화시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괴물의 힘을 실감했던 미연이 홍석에게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애원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권력의 대변자인 강동윤(김상중)의 입을 빌어 그러한 현실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 동윤은 시위대 앞에서는 “촛불을 든다고 뭐가 달라”졌냐 묻고 더 강한 권력에 모든 걸 맡기라 말하며,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분노하는 지원(고준희)에게는 “울 수 있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며 냉소를 보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지배망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도, 역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 중 하나는 주요 인물 가운데 가장 늦게 진실을 알아가며 무력하게 겉돌던 지원과 정우(류승수)의 대화에 있다.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반복해 묻는 지원에게 그는 “먼저 인간부터 되자”고 말한다. 권력은, “사람은 다 똑같”다는 동윤의 말처럼 인간의 존엄을 파괴시키며 서로 불신하게 하지만,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게 만드는 반전의 희망 역시 인간에게 있다. 홍석이 계속해서 추적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배신당하고 절망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동시에 조 형사(박효주) 같은 인간미 넘치는 동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윤이 자신의 계획을 자꾸만 흔드는 홍석 앞에서 대체 “왜 포기하지 않”냐며 이성을 잃었던 것처럼 권력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결국 계산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들이다. 그러므로 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우리 역시 이제는 분노나 울음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포기하지 않고 질문하며 답을 찾아야 한다.
글 김선영
서지수(김성령)는 연애 시절 왜 강동윤(김상중)에게 톨스토이의 를 선물했을까. 땅에 유난히 욕심을 내던 농부 파홈은 어느 벌판에서 하루 동안 달려갔다 원점으로 돌아온 만큼의 면적을 자기 땅으로 가질 수 있다는 소식에 찾아가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되돌아오지만 결국 원점에서 숨을 거둔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그 부질없음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강동윤은 묻는다. “왜 돌아와야 되지?”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결핍과 굴복 사이에서 자랐고, 차기 대통령감으로 손꼽히는 현재도 여전히 장인 서 회장(박근형)으로부터 ‘마름’으로 취급받는 그는 욕망에 한계선을 제시한 룰 자체를 부정한다. 채워지지 않아 멈출 수 없고 끝없이 달려야 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강동윤은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 보면 깔려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이라 정당화한다.글. 김선영(TV평론가)
쉬지 않고 달리는 욕망의 전차
그리고 가난한 형사 백홍석(손현주)의 딸 백수정(이혜인)이 강동윤의 대선 가도에서 희생양으로 깔려죽는다. 권력자들의 싸움판에서 영문도 모른 채 딸을 잃고 아내까지 잃은 백홍석은 딸의 죽음에 최종 ‘오더’를 내린 강동윤을 쫓기 시작하지만, 이 비정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부정(父情)의 드라마는 통쾌한 복수의 재미 대신 첨예한 욕망의 대립에서 동력을 얻는다. 청와대는 ‘정거장’일 뿐, 궁극적으로는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즉 종신 집권이 가능한 재벌 총수의 자리에 앉기를 꿈꾸는 강동윤과 아들 영욱(전노민)에게 그룹을 물려주고자 하는 서 회장은 마주보고 달리는 두 대의 전차처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정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것”이라는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읽어내는 강동윤의 능력은 홍석의 친구인 의사 창민(최준용)과 동료 황 반장(강신일) 등 각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동시에 가장 유혹적인 대가를 제시하는 데서 탁월함을 발휘한다.
그런 강동윤이 지지율 65%를 넘긴 유력 대선 후보라는 점은 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을 찾아 “세상을 바꾸려면 촛불이 아니라 권력이 있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하고 자신이 가진 주식 전부를 전액 기부할 것을 약속한 강동윤은 또한 노숙인들에게 무료 식사 대신 직업 교육 기관을 확충하고 흘린 땀만큼 밥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일본 기자에게 독도 주권 문제를 강력하게 어필할 수도 있다는 면에서 그가 외치는 슬로건 ‘강한 대한민국’은 매혹적이고, 강동윤의 ‘정의’는 서민이자 약자인 백홍석도 감동시킨다. 그러나 한 번의 투표만으로 노동자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의 주식은 애초에 표를 얻기 위한 기회비용이었으며, 복지 혜택 삭감 이전에 필요한 것은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다. 그리고 강동윤이 오른팔 신혜라(장신영)를 검찰 조사에서 빼내기 위해 “사법 개혁안 중 대검 중수부 해체 조항 삭제”를 회유책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거짓된 희망 뒤에 숨은 부당거래의 면면은 어이없을 만큼 허무하고 추악하다.
욕망은 무엇을 전시하는가
그래서 진실과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는 서지원(고준희)에게 “하나만 하자. 재벌집 막내딸이 되든, 사회부 기자가 되든”이라 핀잔하는 최정우(류승수) 검사의 말처럼, 는 우리의 욕망과 지향하는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친구의 딸을 죽이고 받은 대가로 자신의 딸과 안락한 집에서 살며 가사도우미에게 보너스까지 주는 창민처럼,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베풀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서 욕망은 자신이 비교적 선하고 정의롭다 믿었던 사람들을 뒤흔들고, 마침내 살인을 ‘의미 있는 희생’이라 왜곡하는 강동윤처럼 목적을 곧 수단으로 하는 괴물을 낳는다. 하지만 파홈이 마지막 순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묻힐 아주 조그만 땅 뿐이었다. 우리는 누구의 욕망으로 움직이는가. 욕망이 불사르고 지나간 자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가 던진 직구다.
글 최지은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