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100퍼센트] 옥탑방 시대의 사랑
[강명석의 100퍼센트] 옥탑방 시대의 사랑
SBS 의 이희명 작가는 SBS , , 등을 집필했다. 이 드라마들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가 대결한다. 도 착한 여자 박하(한지민)와 나쁜 여자 홍세나(정유미)가 대립한다. 달라진 것은 두 여자의 관계다. 이희명 작가의 전작에서 악녀는 여주인공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직장에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박하와 홍세나는 자매다. 박하의 아버지와 홍세나의 어머니 공만옥(송옥숙)이 재혼한 결과다. 두 여자의 차이는 현재의 계급이 아니라 계급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박하는 공만옥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홍세나는 용태무(이태성) 앞에서 어머니를 부정한다. 직장 오너의 친인척인 용태용(이태성)과 결혼하려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신분상승을 꿈꾸는 악녀의 이야기는 한국 트렌디 드라마에서 지겹게 써먹었다. 하지만 는 홍세나가 아닌 박하의 캐릭터를 변주한다. 홍세나는 박하에게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박하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박하는 9세 이전의 기억을 잃었다. 그 기억에는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그 가족 중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 포함 돼 있다. 기억을 잃은 박하는 고아원을 거쳐 미국에서 살면서 트라우마 없이 밝고 건강하게 살았다. 기억을 간직한 채 한국에서 살았던 홍세나는 악녀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부모는 가난하고, 자신은 짐을 덜기 위해 동생을 버렸다. 홍세나는 신분상승을 통해 자신의 돌아보고 싶지 않은 부모, 동생, 기억에서 벗어나려 한다. 박하는 기억을 일정부분 되찾으며 처음으로 홍세나에게 어둡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기억을 되찾으면, 잊혀진 현실도 돌아온다.

그런 남자는 현실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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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편안한 얼굴을 봐서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 걱정 말아요.” 홍세나는 직장 상사 이각의 요구로 함께 공원을 걷는다. 홍세나가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흙을 밟고 걸을 때 쯤, 이각은 홍세나의 편안한 표정을 보며 퇴근을 지시한다. 이각은 홍세나에게 처음으로 하이힐의 긴장 대신 맨발의 편안함을, 직장 상사를 위한 표정 대신 퇴근 후 자신의 표정을 되찾아줬다. 용태무 역시 자신의 연인 홍세나를 배려하는 매너를 가졌다. 용태무는 아버지가 강행한 선자리를 포기하고 홍세나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회사의 2대 주주인 장회장(나영희)이 홍세나에게 친근감을 보이자 그 사실을 이용하려 한다. 오직 300년 전의 세상에서 온 이각만이 홍세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2002년의 의 남자 주인공 한기태(장혁)는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재벌 2세였다. 차양순(장나라)이 그런 그를 도와 회사의 경영권을 되찾았다. 반면 이각은 몸에 밴 매너와 경제력, 여성의 조건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다. 한기태가 이각으로 바뀌는 10년 사이 SBS 은 재벌가의 아들과 평범한 여자의 결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줬고, MBC 는 신데렐라처럼 결혼한 여성 뒤에 있는 잔인한 현실을 드러냈다. SBS 으로 오면 재벌 2세가 아닌 재벌 3세 김주원(현빈)은 자신이 ‘사회 지도층’이며 길라임(하지원)처럼 평범한 여자는 ‘데리고 노는 것’조차 부끄럽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도 재벌가의 아들이 평범한 여자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는 아예 현실을 지우면서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매너, 부, 선한 마음을 가진 완벽한 신사. 그런 남자만이 진심으로 여성을 사랑해줄 수 있고, 그런 남자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여행으로 현대에 온 조선의 왕세자이자 자신의 환생인 재벌 3세 행세를 하는 남자라는 구구절절한 설정이 붙어야할 만큼.

사랑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대의 드라마
[강명석의 100퍼센트] 옥탑방 시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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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명 작가가 제시하는 판타지가 더 황당해진 것일 수도 있다. 홍세나와 박하가 알고보니 장회장의 친 딸들이었다거나, 용태무가 우연히 공만옥을 차로 치면서 박하가 홍세나와 같은 직장에 들어가게 되는 식의 에피소드는 2000년대 초반에도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이희명 작가가 쓴 설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결코 높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하가 이각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현대 문화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이각이 용태용 행세를 계속 할 수 있다면, 그건 박하 말고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홍세나는 혼자 남겨진 방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운다. 착한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나쁜 여자는 해봤자 제자리다. 의 극단적인 판타지는 현실에 최소한의 판타지조차 남지 않았다는 역설이다. 기억을 지우지 않는 한, 박하처럼 착하게 살 수 없다. 현실을 지우지 않는 한, 이각 같은 완벽한 신사도 없다. 평범한 사람의 현실이란 그렇게 고단하다. 는 그 중 일하는 여성을 판타지로 안내하려 한다. 화장과 하이힐로 무장하고 직장에 나가는 그들을.

그래서 이전에 MBC 과 영화 이 있었고, 같은 시기에 KBS 가 방영되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잃어버린 첫사랑을 소재로, 현재의 인물들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다. 박하나 의 허연우(한가인)는 기억을 잃어버렸기에 순수했다. 기억을 안은 채 살던 홍세나와 의 이훤은 고된 현실을 부딪쳐야 한다. 의 두 남녀는 첫사랑을 되새길수록 다시 만난 사랑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힘없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은 되돌아온 기억과 함께 첫사랑이 돌아오고, 사랑의 힘으로 현실을 바꿨다. 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며 그 시절을 차분히 정리한다. 는 기억을 잃은, 또는 기억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는 남녀가 만나 200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로맨틱한 사랑을 보여준다. 오직 의 서인하(장근석/정진영)와 김윤희(윤아/이미숙)만이 첫사랑의 기억에 메여 있다. 그들의 모든 문제는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의 연장선상에 있고, 첫사랑에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그들을 괴롭게 할 현실은 없다. 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대신, 과거를 그대로 현재에 재현하고, 이어간다. 그럼에도 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중의 현실이 그렇게 사랑에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의 작가가 로 돌아온 시대. 또는 첫사랑과 신데렐라 판타지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시청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시대. 착한 여자 박하처럼 현실을 잊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쁜 여자 홍세나처럼 현실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완벽한 어떤 사랑을 기다리며.

글. 강명석 기자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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