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 아우라에 압도당할 것 같은, 이제는 흰 머리가 적잖게 눈에 띄는 배우의 첫 마디. “떡볶이랑 순대 같이 먹으면서 인터뷰하시죠. 저는 떡볶이 정말 좋아해요. 만들기도 잘 하고. 어유, 장난 아니에요. 으허허허” 의외의 모습이다. 그래서 낯설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주체가 50대 남자배우라서가 아니라, 영화 <올드보이>에서 자신의 신체에 끔찍한 해를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악마를 보았다>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악마를 연기했던 최민식이기 때문이다. “<악마를 보았다> 촬영할 때는 가짜 피라는 걸 알면서도 구역질을 했어요. 진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거든요. 상황에 대한 압박, 설정에 대한 압박, 캐릭터에 대한 압박, 행위에 대한 압박까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죠.” 영화를 본 관객들은 물론 장경철을 연기한 배우조차 마음 편하게 숨 쉬기 힘들었던 <악마를 보았다> 이후, 최민식이 다음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지 궁금했던 건 그래서다. 그것은 무서운 기다림이었다.

그동안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그 뜨거운 온도를 끝까지 품었던 최민식은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물론 “최익현이 모든 인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신경이 면도칼처럼 날카로워”지긴 했지만, 주먹보다 집안사람에 집착하고 총알 없는 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드는 최익현은 타고난 나쁜 놈이라기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보니 여기까지 온 짠한 중년남자에 가깝다. “총알 없는 총은 최익현이 얼마나 나약하고 유치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거예요. 아마 총알이 장전돼 있다 하더라도 쏘지도 못할 거예요. 형배(하정우)한테 총을 스-윽 보여줄 때도 ‘저거 여차하면 형배를 쏘겠구나’ 싶지만 결국 그 총으로 때리잖아요. 얼마나 웃기는 인간이야. 때릴 거면 왜 총을 갖고 와, 다른 도구를 갖고 와야지. 골 때리는 인간이죠. (웃음)”

“취미로 연기하는 아마추어라면 사정에 따라 공연을 안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돈을 받고 일하는 직업배우잖아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알아서 마인드를 바꿔서 촬영장에 나와야 돼요. 책임감이 따르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대사 까먹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이게 얼마나 살벌한 얘기에요. 이걸 인식하는 순간 허투루 행동할 수 없게 돼요.” 20년 넘게 직업과 프로라는 단어가 주는 무서움을 몸소 느끼며 살아 온 최민식이 추천한 ‘내 인생의 영화들’은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하고 진한 작품들이다.




1. <대부> (Mario Puzo`s The Godfather)
1977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정말 고전이죠. 완벽한 연출, 플롯, 연기, 음악,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에요. 명작이라는 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대를 타지 않고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는 건데, <대부>는 그야말로 진리, 진실이죠. 마피아는 하나의 매개체로 작용할 뿐 삶의 축소판을 담은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라는 책을 보면 병법, 대결구도에서의 처세술이나 지혜가 나오지만, 그건 단지 중국의 어느 시대가 아니라 요즘에도 통하는 얘기잖아요. <대부>도 그런 영화에요. 국적을 떠나 예술적으로, 상업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죠. 그래서 전 지금도 가끔 보는데 다시 봐도 진짜 좋아요.”

배우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가 아니었다면 대부라 불리는 사나이 돈 코르네오네와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 마이클을 상상할 수 없었던 갱스터 영화의 교과서적인 작품.



2. <미션> (The Mission)
1986년 | 롤랑 조페

“종교에 상관없이 기도하게 만드는 영화에요. 신의 숭고한 말씀과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영화지만, 굉장히 인간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에 종교가 없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더라고요. 신부들 중에 악랄한 노예상이었던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가 자기 여자와 바람이 난 친동생을 죽인 후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과수 폭포에 올라가서 속죄하는 퍼포먼스를 해요. 그러다가 하늘 아래 첫 동네가 정부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데, 가브리엘 신부는 끝까지 십자가를 들고 순교의 길을 가지만 로버트 드 니로는 끝까지 싸우잖아요. 성스러운 모습과 인간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자연과 음악이 참 잘 어우러진 영화죠.”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가 과라니 족을 만나기 위해 계곡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는 모습은 <미션>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뾰족한 창을 들고 경계하던 과라니 족이 서서히 창을 내려놓고 가브리엘 신부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데, 그 때 그가 연주하던 곡이 바로 ‘넬라 판타지아’의 원곡으로 유명한 ‘Gabriel`s Oboe’다.



3. <올드보이> (Oldboy)
2003년 | 박찬욱

“이런 분위기 속에서 또 작업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장 행복하게 작업했던 영화에요. 몸은 정말 피곤했지만, 박찬욱이라는 예술가와 유지태, 강혜정, 오광록을 비롯한 동료배우들과의 호흡이 참 이상적이었어요. 서로 존중해주고, 누구 한 명도 쓸데없는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걸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거든요. 작업을 해나가면서 이게 과연 어떤 영화가 될지 궁금한데, 찍으면서 드는 촉이 있단 말이에요. <올드보이>는 확신이 있었어요. 촬영하면서 점점 윤곽이 드러나고 실체가 밝혀지니까 와, 근사한 거 하나 나오겠다, 골 때리는 거, 사람들이 안 본 영화 한 편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유도 모른 채 감금돼 15년 동안 군만두로 버틴, 복수심으로 피가 철철 끓는 오대수(최민식). 그런 남자에게 자신을 가둔 이유를 5일 안에 밝혀내면 스스로 죽겠다는 말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뱉어내는 이우진(유지태). 파국으로 치닫는 두 남자의 대결을 보고 있노라면 제대로 숨 쉴 틈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4.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년 | 조지 로이 힐

“옛날에는 서부영화라 하면 보안관이 인디언을 때려잡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어요. 인디언은 미개인이고 야만인이니까 그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식이었는데, <내일을 향해 쏴라>는 진짜 실존했던 서부시대 갱들을 다룬 작품이에요. 얼마 전에 TV에서 다시 방영해주는 걸 우연히 봤는데 정말 정신없이 본 기억이 나요. 지금 봐도 재밌어요.”

갱단을 이끌고 은행만 전문적으로 터는 부치 캐시디(폴 뉴먼)와 선댄스 키드(로버트 레드포드)가 등장하는 <내일을 향해 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추격꾼에 쫓겨 볼리비아까지 온 두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호주로 가자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5. <빠삐용> (Papillon)
1974년 | 프랭크린 J. 샤프너

“이 영화는 꿈을 꾸잖아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옥 같은 생활을 한 빠삐용(스티브 맥퀸)이 재판관한테 이렇게 말해요. “저는 정말 무죄입니다, 전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잘못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재판관은 죄가 있다는 거예요. “인생을 낭비한 죄.” 캬~ 지금도 갑자기 막 가슴이 찔리는데. (웃음) 스티븐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의 명연기, 주옥같은 주제음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참 좋았어요.”

누명을 쓰고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빠삐용(스티브 맥퀸)과 위조 지폐범으로 수감 생활을 하게 된 드가(더스틴 호프만)는 각각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인 검사,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게 복수하기 위해 탈주를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끝까지 자유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는 빠삐용의 모습은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던져준다.




이번 영화에서 대역 없이 격렬한 몸싸움과 액션 연기를 소화했던 최민식은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다. “이제 이런 거(액션) 하면 당연히 힘들죠”라며 어쩔 수 없이 나이에서 오는 한계를 느끼고 있지만 단 하나, 정신의 노화만큼은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몸이야 나이를 먹는 거고 쇠퇴하지만 정신 자체는 끊임없이 진화를 해야 돼요.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것들은 말이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배우들은 그러면 큰일 나요. 우리는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잖아요. 습관처럼 연기하고, 습관으로 생각하고, 어떤 것에 대해 빨리 정의를 내려버리는 걸 가장 경계해야 돼요.” 카메라 앞에 서는 한, 최민식이라는 배우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활화산이자 결코 고이지 않는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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