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만한 솔직함을 갖출 수 있기까지 이청아에게는 오랜 고민과 시간이 필요했다. 실질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영화 <늑대의 유혹>은 “카메라도 몰랐고, 앵글도 조명도 뭔지 몰라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날 데리고 영화를 찍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만큼 엉겁결에 지나갔고, 그 뒤로도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배우를 하기 싫었던 때도 있었다. 연극배우인 아버지는 이청아가 연기를 시작할 때 “너는 여배우의 자질이 없다”라 말할 정도로 반대했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청아는 남들보다 더 진지하게 연기에 접근해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굴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기만 했다. 한없이 내려가던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올라온 것은 전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나고 자신을 찬찬히 돌이켜 보던 스물다섯의 어느 날. “갑자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한 번이라도 잘한다 소리를 듣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도 들고.” 연극영화과 과제를 하면서 먼저 촬영 보조를 하겠다고 나섰고, 열심히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나갔다. “그때는 어렸었던 것 같아요.”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내뱉는 한숨은 이청아의 지금의 성장과 당시의 방황과의 고도 차이를 짐작케 한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를 찍으며 가까워진 친구 박기웅에게 최근 “이제 편해 보여서 좋다”라는 말을 듣고 뿌듯했다는 이청아는 이제야 배우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있다. “재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부럽다는 말을 듣고 있어서 ‘당신도 양은비 부럽죠? 나도 부러워요’라고 되뇌면서 인터넷 반응을 엄청 찾아보기도 하”고, 그동안 소홀했던 팬 블로그를 찾아가 자신을 의심하던 때도 믿음을 보냈던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품기 시작했다. 다음은 길고 먼 여정을 돌아와 이제 넉넉함과 자신감을 찾은 배우 이청아가 여유롭게 회상할 수 있는 우울했던 청춘을 대변했던 음악들이다.
“우울할 때 들으면 더 우울해지는데 이상하게 치유가 되는 느낌? 얼른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게 해주는 노래”라고 이청아가 소개한 못(MOT)의 ‘날개’는 ‘우린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함께 보낸 날들은 너무 행복해서 슬펐지’라는 가사만큼이나 한없이 쓸쓸한 노래다. 늪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어떻게든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려 부산을 떠는 것보다 감정의 격랑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 이언의 나직하게 속삭이는 보컬과 몽환적인 베이스라인이 주는 감정에 일단의 사람들이 고요한 환호를 보내는 것은 그런 이치 때문이 아닐까.
Maroon 5의 ‘She Will Be Loved’에는 이청아만의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던 어느 날, ‘우주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던 때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아무 말 없이 그저 들어보라고 건네준 노래”였던 것. Maroon 5의 보컬 애덤 리바인이 ‘My heart is full and my door`s always open. You can come anytime you want’라는 가사를 담담하게 부르는 것을 듣고 이청아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은 이해를 받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사랑받을 수 있다’라는 기분이 들어 펑펑 울어버렸다고. 슬픔을 나눌 수는 없지만, ‘너’의 감정에 ‘내’가 공명하고 있다는 위로.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이청아는 김윤아를 사랑해 마지않는 가수로 꼽으며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우리 사이에 낮은 담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겐 가 닿지 않아요’라는 가사를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생기면 그 구절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해요”라고 말했다. 관계와 소통의 불완전성을 노래하는 김윤아의 ‘담’에 이청아가 깊은 공감하는 것은 그만큼 배우로서, 또 한 개인으로써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 만큼 타인 또한 가벼이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청초한 피아노 연주에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김윤아의 보컬이 이 곡은 관계의 틈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안겨주는 곡이다.
어떤 노래는 오랜 세월을 지나도록 살아남아 그 노래를 듣는 각자에게 특별한 의미로 새겨진다. 김광석의 92년 발표작 <나의 노래>에 수록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이청아가 <꽃미남 라면가게>를 통해 새로 알게 돼 자신의 플레이어에 깊이 간직한 곡. 마음의 예민한 곳을 헤집는 기타 선율과 담백한 만큼 더 절절한 김광석의 목소리가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하고 노래할 때 애써 다독여둔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꽃미남 라면가게>에서도 이 노래는 차옥균 사장(주현)이 떠나간 부인을 만나고 싶을 때 듣는 노래로 등장했다. 바쁘고 고된 일상에서 문득 옛 기억을 불러오는 김광석의 힘은 발표된 지 20년이 가까워져 오는 오늘에도 유효하다.
<꽃미남 라면가게>에서 양은비는 자신을 떠난 예전 남자친구와 함께 듣던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를 들으며 “이건 그냥 노래가 아니라 그 6년 동안의 나하고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노래는 그렇게 어떤 기억을 멜로디 사이사이, 노랫말 켜켜이 간직한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호텔 코스테의 전속 DJ 스테판 폼푸냑의 라운지 음악 모음집 < Hotel Costes 9 >에 수록된 One Self의 ‘Blue Bird’ 또한 이청아에겐 그런 노래다. “이 노래를 우연히 강남역에서 처음 들었는데 그때 제가 연애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시점이었어요. 그때 연애를 했으면 이 노래가 기억이 안 났을 것 같은데, 연애를 안 해서인지 계속 기억에 남아요.” 그렇게 사람도, 연애도 사라지지만, 노래는 남아서 때때로 기억을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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