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이상 기후, 핵전쟁, 행성 충돌까지, 문학과 예언 속에서 묘사되는 종말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것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 덕분이겠지만, 또 그만큼 종말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여러 요인들이 이미 현실에서 발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준비한 종말의 시나리오 역시 지금 이곳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아닌 픽션, 그것도 아주 과장된 가상이란 것이다.

이 기록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땐 그랬지’ 하는 후일담이라면 좋겠다. 혹 술자리 안주거리가 되더라도 10년, 20년 뒤에 이걸 읽어줄 ‘인류’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여기에 취합한 기록들은 ‘그 일’을 전후하여 벌어진, ‘그 일’을 예감케 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경험한 이야기들이다. 나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지구의 미래와 걸 그룹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임’ 멤버들은 뭔가 위기의 징후가 느껴질 때마다 취재를 했고, 그 개별적 에피소드들을 모아 ‘그 일’에 대한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 일’을 종말이라 부를지, 아니면 그저 대참사 정도로 부를 수 있을지는 아마 몇 분 후에 결정될 것 같다. 방금 전 생존자 그룹은 인류의 생존을 건 마지막 도박을 벌였다. 지하 방공호에 몸을 숨긴 뒤 지상 위를 활보하는 ‘그것’들에게 핵폭탄을 퍼부을 계획인 것이다. 핵은 ‘그것’들의 흔적, 그리고 바이러스까지 불태울 것이다. 다만, 우리 역시 함께 불타 사라질지 모른다. 나도, 이 기록도, 인류의 역사도.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년 2월 17일. 한국 서울 명동. 김문수(본명, 남, 30세)

그러니까 내일 입영을 해야 한단 거죠?
XX, 그게 말이 되냐고! (그는 3차까지 술을 마시고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심지어 내일은 토요일인데! 아니, 김정일이 죽든 말든. 내가 군 복무할 땐 멀쩡히 살아있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나 때는 문제없었으니까 지금 현역 애들이랑 김정은이랑 알아서 해결보라고 해. 올 한해만 버티면 이제 나도 민방위인데 이게 뭐냐고오… 흑. (그는 이 대목에서 살짝 눈물을 보였다.)

그럼 어느 사단 쪽으로 가게 되는지는 아세요?
몰라. 그냥 내일 9시까지 장현초등학교 운동장에 전투복 차림으로 모이래. 지식인에 물어보니까 전역 7년차면 자기 지역 방어라는데 경기도면 후방은 아니잖아. 강원도 산골로 끌려가는 것보단 나은데 이제 전면전 벌어지면 일 나는 거지, 일. 아침에 사이렌 울리고 상황 발생했다고 뭐 진돗개니 카크트 피스톨이니 하고 군장 싸고. 나 군장 싸는 거 다 까먹었다고. 야전삽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모르겠고. 또 위장해야 하는데 자고 일어나면 개기름이 번들거려서 위장크림이 먹질 않아요. 그냥 꺼멓게 모공에만 박히고. 차라리 핵이 펑 터지는 게 편하지.

아무리 그래도 핵 터지면 끝인데.
아침부터 죽어라 군장 싸고 총 맞으러 가는 건 뭐가 그렇게 희망적인데. 그리고 핵이 터진다고 다 죽는 게 아니에요. 복지부동이라고 핵전쟁 때 엎드려서 입 벌리고 눈 가리는 자세 있잖아. 이거 해도 뭐 살 사람 얼마 없겠지만 또 해보는 거지. 모르는 표정 보니까 너 현역 아니구나? 보여줄게. 자 이렇게 팔꿈치로 상체를 딱 받치고 허리를 ? 펴고 배에 힘을 빡! 우에에에엑. (지저분한 일이 벌어졌다.)

* 당시 남한과 일본은 북의 군사도발에 대비해 군사 협력 체제에 대한 협약을 맺었다.

2012년 3월 20일. 한국 경기도 효산시. 다시 김문수

별 일 없어 보이는데요.
뭐 북한군이 휴전선 근처에만 내려오고 아직 별 일이 없나보더라고? 우리 동네 예비군들은 그냥 잠은 집에서 자고 4교대로 이상한 시설 지키는 것만 하면 돼.

편하시겠네요.
사실 땡보는 땡보인데 어째 좀 기분이 좋지 않아. 건물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겉으로 보면 그냥 관공서 같은데 1층에 사람이 거의 없어. 가끔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도 일반 공무원 같지 않고. 저번에 화장실 급해서 들어갔는데 구조가 이상해서 헤매다가 저지당했어. 심지어 미군들, 그것도 그냥 동두천에서 보던 그런 미군이 아니라 정말 좀 특수부대 느낌 나는 미군들이 가끔 뭘 이송하는데 정말 뭐가 있나봐. 밤 근무 서던 애들한테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도 들린다고 하더라고. 찍찍거리는 게 쥐 소리 같은데 더 거칠고 공격적이라는 거야.

* 그가 묘사한 이상한 소리는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됐던 유전자 변형쥐들의 찍찍대는 소리와 거의 백퍼센트 일치.

2012년 5월 7일. 미국 아칸소. 쉘든(본명, 남, 24세)

그러니까, 너희 사촌 형이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얼마 전 한국에서 돌아왔는데 온 몸이 불덩이인데다가 계속 기침이야. 군 주둔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긴장이 풀려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제 저녁에는 몸에 벌건 발진이 생기는 거야. 바로 병원에 연락해서 응급실로 보냈지.

야… 넌 괜찮은 거야? 난 괜찮은 거고?
나도 옮는 건가 싶어서 겁이 덜컥 났는데 병원에서 검사해보더니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의사가 형의 증상을 보자마자 혹시 주한미군이었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렇다고 하니까 별 말은 안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겠어. 주한미군 출신의 똑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가 있다는 얘기잖아.

* 2차 변형 이전 1차 변형을 거친 바이러스의 감염이 의심되지만 아직 확인되진 않았음.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년 6월 7일. 일본 오사카. 코다 쿠미(가명, 남, 34세)

처음으로 진동을 느낀 게 언제였죠?
생생하게 기억을 하지. 5월 15일 경기였어. 오릭스의 4번 타자 대호짱이 5회 말에 3루타를 치고 나갔거든. 뭐 그 정도 타구에 다른 타자였으면 그라운드 홈런도 가능할 뻔했지. 하지만 그보다 더 굉장한 장면이 그 다음에 등장한 거야. 다음 타자가 볼넷으로 1루에 나가고 원아웃에 1, 3루 상황이 됐지. 그리고 투수가 1루에 나간 주자를 견제하는 사이에, 오, 맙소사, 대호짱이 홈스틸을 한 거야.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그런 일 있지? 그걸 보는 순간,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일들. 그 때가 그랬어. 그래서였던 것 같아. 나를 비롯해 그 수만의 관중들이 지진의 진동을 몇 분 후에야 깨달았으니까.

무려 야구장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었다고요.
그런데도 처음 2, 3분 정도는 대호짱이 홈으로 달리는 진동이 야구장 전체를 휩쓰는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물론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너라도 현장에서 그 모습을 봤다면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았을 걸? 그리고 또 3, 4분 동안은 엄청난 장면을 본 우리의 심장박동이 그렇게 크게 두근거리는 건가 했지. 만약 외야에 있던 누군가가 “지진이다!”라고 외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몇 분 더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있었을 거야.

지진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나요?
가정집 찬장에 있는 접시 같은 게 와르르 쏟아져 깨졌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어.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책장의 책이 쏟아진 정도? 참 애완용 거북이 유리 용기가 깨지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뭔가 작은 걸 기르던 사람들은 좀 많이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거미 같은 걸 기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2012년 7월 2일. 프랑스 리옹. 앙리(본명, 남, 33세)

와우, 프랑스의 유로 우승이라니. 난 당연히 스페인일 줄 알았는데.
유로야 어느 나라가 우승해도 이상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프랑스의 우승은 다른 의미로 좀 신기하긴 하지.

무슨 뜻이야?
펠레가 잉글랜드와 스페인 대신 프랑스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고. 사실 그 예측 들었을 때만 해도 이젠 다 틀렸어, 라고 생각했다니까?

우핫, 그거야 말로 엄청난 이변인데? 지구 멸망의 징조라고 해도 믿겠어.
2012년에 멸망한다더니 이런 거 아닐까? 하하하.

* 우크라이나로 유로 2012를 보러온 일본인 관광객 중 처음으로 ‘그것’ 등장. 이후의 감염자들은 ‘그것’이 되기 전의 관광객과의 혈액 혹은 타액 접촉으로 인해 감염 추정.

2012년 9월 8일. 미국 뉴욕. 미키(본명, 여, 29세)

무슨 일이죠?
쥐, 쥐… (무척 겁에 질려있었다.)

쥐요? ‘그것’이 아니고요?
모르겠어. 모르겠어. 보통의 시궁쥐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을 공격해.

그렇게 난폭한가요? 다들 ‘그것’들의 습격 때문에 숨고 도망치는데 단지 쥐 때문에 겁을 먹을 정도로?
그냥 물리고 상처를 입는 게 문제가 아니야. 난 봤어. 분명 감염자도, 보균자도 아닌 사람이었어. 둘 다 서로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목숨을 끊어주기로 하고 ‘그것’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지. 그러다 쥐를 보았고, 부끄럽지만 식량으로 써볼까 하고 접근해봤어. 그러다 쥐에 물렸던 그가 하루 만에 이상증세를 보이는 거야.

쥐가 바이러스 매개체라는 건가요?
몰라. 난 의사도 뭣도 아니라고. 그냥 내가 본 걸 말하는 것뿐이야.

* 이후 쥐를 통한 감염 루트 역시 공식적으로 확인됨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 특집│마지막 그 날의 가상 시나리오
2012년 11월 23일. 일본 오사카. 다시 코다 쿠미

어디서부터 이 일이 시작된 걸까요.
글쎄… 알 수 없지만 대호짱이 홈스틸을 하던 그 순간이 인류 멸망의 전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 (씁쓸히 웃었다.)

2012년 12월 20일. 한국 서울. HAM 무전기를 통한 김문수와의 교신

누구시죠? 생존자인가요?
나 김문순데.

네?
나 김문순데.

뭐라고요?
나 김문수라고! 지난겨울이랑 봄에 만났던!

아! 기억나요. 용케 살아있었군요!
집 근처 방공호에 있어. 아, 라면 먹고 싶다. 그건 그렇고 소식 들었어? 생존한 지도층이 북측에 요청해 핵을 쓰기로 했대. 그냥 싹 다 태워버릴 건가봐.

핵이요? 그럼 우리는요?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런 생각이겠지.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핵이 터진다고 꼭 죽는 건 아니야. 내가 저번에 가르쳐줬던 자세 생각나지? 다시 직접 보여줄 수 없어 아쉽네. 어쨌든 꼭 살아서, 다시 보자고. 꼭!

글. 위근우 기자 eight@
일러스트. 그루브모기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