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에서 남자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다. 교통사고인지 타살인지 자살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조차 아직 모른다. 상현(신성우)은 죽은 은필(김갑수)이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대학의 시간강사이면서 은필의 부인 윤희(황신혜)와 외도 중이고 상현의 부인이자 윤희의 어린 시절 친구 진서(김혜수)는 은필의 정신과 상담의로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은필의 누나 은숙(윤여정)은 남동생의 죽음에 있어 윤희를 의심하고 의문의 ‘빨간 원피스 여인’은 기묘한 공기를 만들어내며 이들 주위를 떠돈다. MBC 은 낯설고, 어떤 면에선 ‘피곤한’ 드라마다. 모든 등장인물은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자신마저 의심한다. 불같은 로맨스에도 행복한 가정에도 유지비는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줄거리를 따라가며 편안히 즐기기보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해야 하는 이 작품은 3사 수목 미니시리즈 가운데 시청률 3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11일 MBC 양주 세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성우는 “회를 거듭하다 보면 익숙해지실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김혜수는 “뭐, 또,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때? 그죠?”라며 웃었다.그래서, 성은필은 죽은 건가 산건가.
김혜수 : 나도 궁금하다. 처음 대본보고 “성은필 안 죽은 거죠, 안 죽을 수도 있죠?” 물어봤는데 뭐라 명쾌한 대답을 안 해 주신다. 심지어 사람들이 나보고 범인이라고…(웃음)
신성우 :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여지는 존재한다. 수많은 추측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이 작품이 주는 매력인 것 같다.
“장르를 규정하지 말고 그냥 즐기면 된다” 출연진도 성은필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인가?
신성우 : 에이, 알고 연기하면 연기가 되나?
김혜수 : 알아도 연기 열심히 할 테니까 알려달라고 했는데 안 가르쳐 주신다. (웃음) 작가님께서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으로 대본을 다 구성해보셨고 복안이 많으신 것 같다. 엔딩에 대해서도 ‘반응을 봐서 어떻게 하겠다’기보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적 재미를 충분히 주신 다음 결론을 내리실 것 같다. 그런데 성은필을 누가 죽였는지는 감독님, 작가님하고 연출진까지는 어떻게 얘기가 됐을지는 모르지만 배우들 중엔 아무도 모른다.
신성우 : 죽인 배우도 모를 거다. (웃음)
김혜수 : 내가 (황)신혜 언니한테 “모윤희가 죽인 거야?” 했더니 언니도 “몰라~”그러고, 김갑수 선배님께 “성은필 진짜 죽긴 죽은 거죠?” 여쭤봤는데 선배님도 “글쎄, 나도 뭐 죽은 줄 알았는데…모르겠어…” 하시는 거다. (웃음) 성은필의 비서가 모윤희를 짝사랑해서 죽인 게 아니냐고 농담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제목은 이지만 내용은 밝거나 즐겁지 않다. 처음 이 제목을 보고 대본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김혜수 : 사실 제목이 너무 홈드라마 같아서 미니시리즈 치고는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놉시스 첫 장을 보고는 바로 대본으로 넘어갔다. 작가님이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만든 사람은 평생 가정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쓰셨더라. 그래서 이 평이한 것 같은 말 속에 역설적인 것 이상으로 다의적인 의미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본이 소설 읽는 것처럼 훅 읽게 될 만큼 재미있었다. 어떻게 드라마에서 캐릭터들을 이렇게 그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빨간 원피스 여자’가 나오는 대목에선 무서워서 심장이 막 뛸 정도였다. 1, 2부는 너무 재밌었고 3, 4부를 읽으면서는 이 드라마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해봤고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 어른들이나 사회가 조장하는 ‘힘들지만 지켜야 해. 참는 자에게 복이 있어’ 같은 거나 우리 사회에서 은근히 강요되는 여자들의 희생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싫어하고 여자를 그렇게 그리는 드라마에도 거부감이 있었는데 4부에 진서가 상현이 윤희와 바람 피웠다고 의심하면서 상현더러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하는 내용이 있다. 결국 거짓말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진서가 코너에 몰려 우는데 시어머니가 “그래, 다 뽀사 뿌리고 갈라서면 되지. 근데 너 그 부서진 심장 갖고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하는 대사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사실 “너 사는 게 다 사는 건 줄 아니? 열 번 중에 여덟 번 괴롭고 두 번 웃자고 사는 거야” 같은 말도 익히 듣고 살지만 이 작가는 이런 걸 정말 진심으로 그리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 드라마를 하면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가정, 결혼, 부부관계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상 한 마디로 설명하기 복잡한 드라마다. 불륜도 있고 부부간의 애증도 있고 통속극 같기도 하면서 미스터리 요소도 많고.
김혜수 : 상황 상 좀 열악한 것 같긴 하다. 구성 자체가 새로운 드라마인데 초반에는 오히려 불륜에 막장 드라마라는 오해를 받은 게 안타깝다. 그럼에도 재밌게 봐 주시는 분들이 감사하고, 배우로선 대본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한 신, 한 신 다 힘들고 집중해야 하지만 대본 봤을 때의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하게 된다.
신성우 : 규정짓고 보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무슨 장르라고 보지 말고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진서는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는 여자이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과 아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동년배의 여성으로서 진서가 겪는 감정이나 딜레마 가운데 특히 감정이입 되는 부분이 있다면?
김혜수 : 어른들이 흔히 “결혼해야 철든다. 자식 낳아보면 정말 그 때 어른이 된다”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나야 뭐 결혼도 못했고, (신성우 : 아니, 안 했고!) 네, 안 했고 (웃음) 자식도 낳아보지 못했지만 조카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정서적 변화가 크다. 조카들이 세 명이었다가 어제 새벽 네 명이 됐는데 원래 아이들을 좋아해서인지 다 내 자식 같다. 그래서 아이가 있다는 점에 대해 감정이입이 많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엄마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의 심리 면에서, 상현은 진서가 모든 걸 걸고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을 지키고 싶은 상대지 않나. 상현이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진서가 왜 이 사람이랑 결혼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 연애할 때는 상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서 좋아했을 거다. 진서도 반듯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게 내 사람, 내 가족이 되다 보니 내가 위협받고 내 가정이 위협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거다. 상현이 ‘경계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경계라는 게 이기적인 것 같지만 그게 없이 살면 다 ‘너무’ 친해지는 거니까. (웃음) 그러니까 내가 정말 너무 사랑하고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자꾸 나의 진정과 어긋날 때의 감정 같은 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신성우의 수염과 하나로 묶어 넘긴 머리 스타일은 일종의 트레이드마크다. 현대극과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비주얼을 바꾸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해 봤을 것 같다.
신성우 : 드라마 촬영 시작했을 때 뮤지컬 두 편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그 작품들에서는 캐릭터 상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감독, 작가님도 변화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이 드라마에 출연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걸 감안하고, 상현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고집스런 성격이니까 어울릴 수도 있다는 결론에서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건 안다. 왜 수염을 기르고 나오냐, 나이 들어 보인다 등. 사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 (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에 좌지우지된다면 상현이도 아니고, 더 깊이 들어가서는 신성우도 아니다. 분명한 건 드라마 내용에서 상현에게 변화의 계기가 올 거라는 거다. 그 때가 오면 결심을 하고 모조리 다 바꾸게 될 텐데 보시는 분들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다.
“도, 도, 우리 드라마도 잘 되면 좋겠다” 의 독특한 캐릭터와 분위기가 연기에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신성우 : 내 입장에서는 좀 크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캐릭터가 한 선을 유지하고 갔는데 이상현이란 캐릭터는 표면적으로 굉장히 약자다. 조직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집단을 만날 때의 모습을 표현하는 게 상당히 복잡하다. 최고의 숙제를 만난 것 같고 개인적으로 많은 걸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보기에 신성우는 평생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인 것 같다. (신성우 : 그렇다. 하하) 하지만 상현은 가정이나 조직에서 약자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자신이 가진 순수함을 포기할 때도 있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심정이 어떤가.
신성우 : 정말 이상현은 내 성격하곤 정 반대에 있는 사람이다. 난 우유부단함도 없고, 경계? 나한텐 아군, 적군밖에 없다. 너 우리 편이야? 아냐? 적군이구나, 이런 식인데. (웃음)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성격의 반대쪽만 한번 훑어보면서 접근하려고 한다.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시청률은 좀 서운한 게 사실인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신경 쓰이지 않나.
신성우 : 예전부터 부르짖은 게 있는데 굳이 배우가 시청률에 신경을 써가면서까지 극을 한다는 건 좀 말이 안 된다는 거다. 작품 안에 있는 배역만 충실히 연기하는 게 배우 몫이지 시청률은 배우 몫이 아니고 그걸 신경 쓰면 잘 하지 못할 것 같다.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있다. 워낙 대본도 좋고 배우들이 연기도 잘 하기 때문에 올라갈 수밖에 없을 거다.
김혜수 : 그럼 신경 쓰는 거네~ (웃음)
신성우 : 그렇다고 하나도 안 쓸 수는 없잖아. 나 빼고 다 쓰는데. (웃음)
김혜수 :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바로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KBS 가 워낙 기대를 많이 받는 작품이었고 SBS 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고현정 씨를 참 좋아한다. 이 나이에 배우의 힘을 가지고 그렇게 시청자를 사로잡는 경우도 드물뿐더러 그렇게 뛰어난 배우를 우리가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참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좋았다. 시청률 기대 안 했다고 하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대하진 않았다. 오래 연기를 했지만 시나리오건 대본이건 보고 나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어머, 나 이거 하고 싶어’라는 마음이 들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대본을 만났을 때 거절해야 될 이유는 없다. 나만 잘 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주변에서 우려하고 현실적인 얘기할 때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초반에 작가님께도 “진짜 도 도 잘 되면 좋겠고, 우리 드라마도 잘 되면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 배우가 배우로서 연기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걸 만났을 땐 다른 배우가 그걸 안 해준 게 고마운 거 아닌가? (웃음) 지금도 매일 촬영하는데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이지만 솔직히 힘든지 모르겠고, 어떨 땐 찍고 나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청심환을 먹어야 될 정도지만 기분 괜찮다. 연기하면서 ‘정말 할 맛이 나’ 라고 느끼는 건 배우한테 너무 좋은 거다.
신성우 : 많이 팔렸다고 좋은 음악인 건 아니니까. 노래로 누군가를 한 번 울리려면 만드는 사람은 천 번 울어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계속 열심히 해 나가겠다.
김혜수 : 와, 그 말 너무 멋있다! (웃음)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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