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누가 떠오르는가? 어떤 이는 분홍복면의 은행강도()를, 또 다른 이는 드라마 의 강직하고 의로운 강승조를 기억할 것이다. 반면에 커피콩을 면도칼처럼 씹으며 상대를 위협하는 조직의 보스 재칼()이나 같은 남자를 짝사랑하는 소녀 같은 최관장(드라마 )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류승룡이라는 배우를 불러내기 위해 한 가지로 수렴되는 이미지는 없다. 그것은 그가 20편이 훌쩍 넘는 영화와 드라마를 쉼 없이 오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거친 캐릭터들은 차곡차곡 모아 담아 하나의 비로소 커다란 인형이 되는 마트료슈카 인형처럼 류승룡을 구성하고 있는 동시에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그 자체로 완성형이다. 과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수많은 인형들. 배우로서 그의 운신의 폭을 측정하는 작업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 보폭이 남긴 기다란 발자국 위에는 딱 중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평범한 인물들도 포진하고 있다. 그는 소위 센 연기라고 하는 악역이나 성격파 외에도 여주인공의 남편()이거나 주인공들의 사연을 추적하는 화자()였다. “평범한 역할들은 일종의 도전이에요. 자극적이지 않고 평범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부분까지 다 할 줄 알아야 낙차가 심한 역할도 잘 할 수 있으니까요. 자극적이고 센 거, 웃기거나 슬프거나 소리 지르거나 싸우는 악역만 잘 한다고 좋은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균치에 있는 역할에도 도전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평균치에 있는 역마저 또 다른 류승룡으로 소화해고야 마는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신 안에 있는 모습들을 꺼내 보이는 것이다. “ 때도 ‘류승룡이 무슨 멜로야, 말도 안돼’ ‘저 사람이 외모적으로 럭셔리하고 드레스업한 모습이 가능할까’ 이런 것들을 안팎으로 깨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섬세하면서도 소년 혹은 소녀 같은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그런 것들이 너무 재밌어요. 내 안에 있는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 다양한 인간을 꺼내 보여준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영화들도 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다음은 처음 접한 뒤로 20년이 흘러도 그의 연기에 자양분이 되어 준 영화들이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1. (Time Of The Gypsies)
1989년 | 에밀 쿠스트리차
“대학 다닐 때 은사님께서 추천해주셔서 본 영화예요. 굉장히 오래됐죠? (웃음) 전체적인 분위기가 몽환적이면서도,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아,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영화예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모습, 인간들의 군상, 탐욕 이런 것들이 드러나는 영화에 끌립니다.”

1989년 칸 영화제에서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주며 일약 거장의 반열에 올린 출세작.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집시 청년의 유랑은 괴이하기까지 하지만 묘하게 아름답고 슬프다. 전문배우가 아닌 실제 집시들의 춤과 노래 또한 빼어나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2. (Underground)
1995년 | 에밀 쿠스트리차
“도 굉장히 아이러니한 블랙 코미디네요. 전쟁이 끝났는데도 지하에서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죠? 제게 영감을 주었던 영화들이 다 본 지가 20년이 다 되어가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그 당시에 제게 많은 자극을 줘서 연기에 더 몰입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지요.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입니다.”

199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이 지루할 새가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특유의 경쾌한 집시음악과 함께 이어진다. 영화는 아픈 상처를 간직한 대륙, 유고의 상흔을 전쟁에 대한 조소를 담아 어루만지고 있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3. (The Pianist)
2002년 | 로만 폴란스키
“극중에서 피아니스트를 너무나 완벽하게 소화한 애드리언 브로디도 너무 멋졌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였어요. 피아노 연주로 목숨을 건지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어찌 보면 블랙코미디 같기도 하구요.”

전쟁으로 피아니스트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의 몰골은 비참하지만 피아노를 앞에 둔 마지막 순간 고귀하게 빛난다. 영화는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유년기를 보낸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200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03년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안겨줬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4. (Life Is Beautiful)
1997년 | 로베르토 베니니
“가볍지 않으면서도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나오는 코미디를 좋아해요. 웃고 있는데 슬픈 영화들이 있잖아요. 영화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은 사회 고발이나 풍자, 이념의 갈등, 구원, 죽음, 사랑 등등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족애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가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 같아요. 부자지간의 사랑을 다룬 처럼요.”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을 유머로 버무려낼 수 있는 사람은 로베르토 베니니 뿐일 것이다. 감독이자 주연으로 활약한 베니니는 전쟁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광풍에서 아들을 지켜내는 아버지로 눈물과 웃음을 고루 뽑아낸다. 199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5. (The Son)
2002년 |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민규동 감독이 추천해서 보게 된 영환데 여러분도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아들을 죽인 범인과 만나게 되는 아버지가 주인공인데,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었어요. 그래서 음악도 없고, 카메라가 집요하게 남자의 뒷모습만을 ㅉㅗㅈ아가죠. 그런데도 울고 있는 남자의 등이 너무 많은 걸 느끼게 하죠. 국내에서 널리 상영되지 못했던 게 너무 안타까워요.”

여기, 내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수와 용서, 두 개의 선택지가 있겠지만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는 그저 어떻게 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영화 역시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 관객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질문 뿐. 때로 영화는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묻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2002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인간 군상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
류승룡은 바쁘다. 10월 21일 개봉한 에 이어 장훈 감독의 , 이준익 감독의 ,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다룬 등 기대작들을 줄줄이 촬영 중이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장르도, 캐릭터도 없을 것만 같은 그가 욕심내는 분야는 멜로.

“인지도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데 그게 조금씩 생기니까 선택의 폭이 커져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코미디, 스릴러 등 이미 많은 장르, 캐릭터를 해봤고 다양한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있어요. 하지만 매 작품 마다 안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매번 맑은 샘물이 나오게 하고 싶어요. 물론 격정멜로도 하고 싶죠. (웃음)” 매번 다른 느낌으로 우리와 만난 류승룡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어떨까? 분명한 건 그 때도 이제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로 등장할 거란 사실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