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F+10] 류승룡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PIFF+10] 류승룡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의 이서군 감독은 류승룡에 대해 “선물 같은 배우”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에 대해 말하는 건 사실 지겨운 일이다. 영화 , , , 등 최근 1-2년으로만 한정시켜도 풍성한 필모그래피를 늘어놓거나 MBC드라마넷 의 강승조, MBC 의 최관장처럼 근엄함과 귀여움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운신의 폭을 측정하는 작업도 이미 있었다. 오히려 배우가 아닌 사람 류승룡에게 포커스를 맞췄을 때도 여전한 매력을 말하고 싶다. 인터뷰라는 공적인 업무을 “인터뷰 같지 않고 막 얘기하는” 사적인 시간으로 만드는 그의 능력은 탁월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 대신 손을 맞잡아 인사를 하는 특유의 친화력 때문만은 아니다. 가깝게 의자를 고쳐 앉아 상대의 눈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라보는 그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진다. 연기에 대해 말할 땐 진중함을, 일상에 대해 말할 땐 “깨알 같은” 유머를, 가족에 대해 말할 땐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의 든든함을 풍기던 류승룡을 부산에서 만났다.

신작 으로 제 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극중에서 된장의 미스터리를 추적해가는 최PD는 최근 발견되기 시작한 류승룡의 귀여움이 많이 묻어난다. MBC 의 최관장 이전까지는 악역이거나 진중한 남성을 주로 연기했는데.
류승룡: 그동안 노출된 모습들이 나의 한 부분이었듯 에서의 귀여운 모습도 내게 있는 많은 모습 중 하나다. 이서군 감독이 여성이다 보니까 귀엽고 섬세한 연기를 좋아하더라. (웃음)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그런 부분이 전혀 할애되지 않았다. 촬영하면서 감독이 평상시 나의 유쾌한 모습을 보고 끌어내려고 한 것 같다.

이서군 감독은 이후 12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내놓았는데, 그와의 작업은 어땠나?
류승룡: 12년의 공백이라면 대개는 다른 일로 전업하기 마련인데 그동안 결혼도 했고, 공부도 하면서 이서군이라는 인물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 연륜이 생기고 진지해지면서 초기 데뷔작과는 다르게 십여 년의 공력이 고스란히 에 담겨진 것 같다.

“센 역할만 잘 한다고 좋은 배우가 아니다”
[PIFF+10] 류승룡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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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반면, 은 대중적으로 상냥한 태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상업영화의 문법과는 조금 다르다. 미스터리, 멜로, 판타지,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경계 없이 섞여 들어가고 있는데.
류승룡: 그래서 상업영화의 문법을 넣으려고 내가 좀 고군분투한 거 같다. (웃음) 너무 진지하게만 가면 예술영화로 선입견이 생기니까. 미스터리, 판타지, 멜로, 코미디가 다 담겨있는데 코미디가 없으면 안 된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미스터리만 있다가 아름다운 멜로가 등장하는 거랑 웃음이 막 나오다가 아름답고 진지한 멜로가 나오는 건 다르니까.

사실 최PD는 혜진(이요원)과 현수(이동욱)의 사랑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화자 같은 캐릭터다. 연기로 강렬하게 기억되고 싶은 배우 입장에서는 그다지 끌리지 않을 배역이다.
류승룡: 영화에서 관찰자 시점을 맡고 있기 때문에 양적으로는 많이 나오지만 어떤 장치나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는 역할이라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폭발하는 연기는 1차적인 것이고, 쉽기도 하다. 실제로 최PD는 밋밋하고 배우들이 제일 꺼려하는 스타일의 배역이다. 예전에 했던 의 남편 역할처럼 일종의 도전이다.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고 평범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연습할 때도 가장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까지 다 할 줄 알아야 낙차가 심한 역할도 잘 할 수 있다. 자극적이고 센 거, 웃기거나 슬프거나 소리 지르거나 싸우는 악역만 잘 한다고 좋은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균치에 있는 역할에도 도전해봐야 한다.

그런 배우로서의 진폭을 만드는 과정 중에서 의외였던 게 의 재칼이었다. 언제나 캐릭터에 진짜로 존재할 것 같았던 현실감을 부여했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전혀 현실에 발붙인 것 같지 않은 악역이었다.
류승룡: 이제껏 했던 역들이 다 내 안에서부터 끄집어 낸 거였는데 유일하게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캐릭터가 재칼이었다. 이나 , 과 마찬가지로 에서의 폭력성도 내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잠재된 악이라고 할까? 그래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재칼은 전혀 다르게 나를 완전히 버리고 내 안에 없는 모습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느낌이 들지만 그렇게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없는 모습이니까. 그런 모습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웃음)

그렇다면 최근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안겨주었던 의 최관장 역은 어땠나?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데다 소녀적인 면까지 있는 재벌 2세였는데.
류승룡: 만약에 정 씨였으면 정관장이라 CF라도 하나 찍었을 텐데. (웃음) 남자를 좋아하는 모습은 나한텐 없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은 있다. 사랑에 대한 설렘이나 잠 못 이루고, 보고 싶어서 미치고, 열병을 앓은 적은 다들 있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콘셉트로 시작했다. 전진호(이민호)도 사람이다 혹은 사랑했던 연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적 소수자들의 성향이나 버릇 같은 건 일부러 전혀 고찰하지 않았다. 그들도 평범하게 사랑하니까. 그래서 오히려 더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진 않지만 집단 최면,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들은 항상 희화적이고 여성적으로 묘사하는지, 불만이었다.

“내 안에 있는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보여주는 게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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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만 을 시작으로 , , , , , 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줄줄이 개봉하거나 촬영 중에 있다. 그럼에도 매 작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데, 본인의 얼굴을 굉장히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류승룡: 내 얼굴 굉장히 만족한다. (웃음) 물론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만족스럽게 바꿀 수 있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세월과 감정을 담아내는 이 얼굴이 좋다. 세월에 맞게 주름도 생기고, 수염도 희어지고. 배우에게 얼굴은 그 나이에 맞는 멋, 그 나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이다. 특히 얼굴에서도 눈이 정말 중요하다. 눈은 거짓말을 안 한다. 마음의 창이니까. 어떤 네티즌이 똑같은 사극인 와 에서 똑같이 화를 내는데 눈이 다르다고 하더라. 수염이나 옷처럼 비슷한 외피에 똑같이 분노하는 장면인데도 에서는 의로운 열정이 폭발해서 나오는 분노고, 에서는 소유하지 못해 생긴 분노고. 그게 눈에 드러난다고 해주니까 너무 고맙더라. 실제로 그런 마음을 깔고 연기했다.

최근 개봉한 의 상도는 악독하거나 나쁘지는 않지만 무능한 가장이었다. 가정에서 류승룡은 어떤 아버지인가?
류승룡: 아이들에게 해가 쨍쨍 내리 쬘 때 휴식이 되고,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집이 필요할 때는 그 나무를 잘라서 집을 지어주는 든든한 아빠 혹은 올라타서 놀이터가 될 수 있고, 배가 고플 때는 열매도 열어주는 그런 아빠. 요즘은 너무 바쁘긴 하지만 다행히 6살 난 큰 아들이 아빠가 왜 바쁜지, 무엇 때문에 바쁜지를 안다. 자기를 위해서, 엄마와 동생을 위해 바쁘다는 걸 안다. 항상 얘기 많이 하고, 영상통화 자주 하고, 촬영장에서 인증샷 찍어서 보내주면서 이해를 시켰다. (웃음)

지금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줬는데 배우로서 더 꺼내놓고 싶은 면이나 아직까지 보여주지 않은 모습들이 있나?
류승룡: 사람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장르가 멜로나 코미디, 스릴러 같은 것들인데 이미 많은 장르를 해봤다. 물론 그러면 ‘아, 이제 쟤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계 인구 60억 중에서 반이 남자고, 우리나라만 봐도 40대 남자가 얼마나 많겠나. 그러면 그 수만큼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샘을 계속 파면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작품 마다 안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매번 맑은 샘물이 나오게 하고 싶다. 실제로도 지금은 장르를 불문하고 시나리오가 들어온다. (웃음) 어떤 배우들은 마초만 스릴러만 학원물 혹은 멜로만 코미디물만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게 장점일 수도 있지만 한정적인 모습으로 각인됐다는 뜻도 있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스릴러의 악역도 제의가 오고 있고 코미디나 멜로도 슬슬 들어오고. 물론 격정멜로도 할 거다. (웃음) 인지도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데 그게 조금씩 생기니까 선택의 폭이 커져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러고 보니 본격적인 멜로를 한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에서의 애절한 눈빛을 보니까 멜로배우로서의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류승룡: 진짜 멜로는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나 처럼 권력으로 좋아하는 상대를 소유하려고만 했지. 본격적인 멜로도 꼭 해보고 싶다. 왜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말 많이 하지 않나? ‘너 되게 의외다’ 같은. 근데 그 사람을 왜 그렇게들 쉽게 판단하는지. 도 ‘류승룡이 무슨 멜로야, 말도 안돼’ ‘저 사람이 외모적으로 럭셔리하고 드레스업한 모습이 가능할까’ 이런 것들을 안팎으로 깨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다. 섬세하면서도 소년 혹은 소녀 같은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그런 것들이 너무 재밌다. 내 안에 있는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

[PIFF+10] 류승룡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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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부산=이지혜 기자
사진. 부산=채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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