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우리나라의 배우들을 인터뷰이로서의 능력으로 줄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 거론되는 배우들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정우성은 분명 선두그룹을 형성할 것이다. 그와의 대화는 개봉을 앞둔 영화 나 얼마 전 다녀온 베니스영화제 등 당장의 화제에만 집중되지 않았다. 그가 꺼내놓는 답변들은 정우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아닌 정우성이라는 사람 안에 들어찬 생각을 쫓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관상보다는 경청에 적합한 사람이다. 그저 바라만봐도 흐뭇한 정우성의 아름다움이 그가 제시한 철학에 의해 빛을 잃을 위기의 순간, 진짜 정우성을 만난 것 같았다.

방금 의 언론시사가 끝났다. 국내에는 처음 공개되었지만 이미 베니스영화제에서는 한 차례 선을 보이기도 했는데.
정우성: 나도 베니스에서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고, 그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전에 으로 칸에 간 적은 있었지만 로 베니스를 찾은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은 우리 영화로 갔던 거지만 는 중국 영화니까. 마침 시사를 하는 날에 오우삼 감독이 평생공로상을 받아서 함께 했는데 누가됐든 한국 영화인도 이런 시간을 언젠가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한국인으로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짜릿하기도 했고. 현지에서 나 에서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냉정하게 가 한국 관객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거 같다.

“스타로서의 자각은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작점”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에는 의외의 즐거움들이 있더라. 특히나 지앙은 청순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무협영화의 남자 주인공과는 많이 달랐다. 전반부에서는 코믹을, 후반부에서는 멜로와 액션을 담당하는데 액션배우의 면모 뿐 아니라 멜로 배우로서의 장점들이 많이 부각됐더라.
정우성: 그렇게 느꼈다면 의도하고자 했던 캐릭터를 완성해낸 것 같다. (웃음) 영화의 전반부에는 ‘지앙이 도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까’ 하는 의문이 들 거다. 지앙은 순수하면서도 사랑에 겁 없이 다가가지만 또 수줍기도 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우성이 저런 것만 할려고 나오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 거고.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반전의 키를 쥐고 복수를 꿈꾸는 남자의 모습까지 쭉 보여줄 수 있었던 게 흥미로웠다. 베니스에서 처음 보면서도 잘 표현 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중국의 무협영화에 출연하는 만큼 물론 중국어나 검술은 기본이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도 중국어 대사가 굉장히 자연스럽다. 칼을 이용한 액션도 능숙하고.
정우성: 중국 배우가 대사를 녹음한 걸 영화 촬영 전부터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그냥 대사를 외우는 게 아니라 말이 가진 의미를 숙지하면서. 특히나 제 2외국어를 배우는데 가장 좋은 건 사랑이라지 않나? (웃음) 양자경과 멜로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감정 신을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검술 같은 경우는 촬영이 없을 때도 촬영장에 놀러 가서 항상 칼을 휘두르고 다녀서 양자경도 칼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 중국의 검술은 한국과 달리 모든 동작의 마지막에 손가락 2개를 절도 있게 모아서 세우는데, 그게 제일 어려웠다. 내 손가락만 마지막에 혼자 브이 그리고 있고. (웃음)

그런 노력 덕분인지 영화를 연출한 오우삼 감독은 당신에게서 “전성기 시절의 주윤발의 모습을 보았다”고 할 정도로 극찬하더라.
정우성: 감독님은 처음에 를 보고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대만영화제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아마 주윤발의 모습을 봤다고 하신 건 내가 주윤발을 닮아서가 아니라,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독으로서 배우를 찍고자 하는 영감이 정우성이란 배우를 보면서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일 거다. 그런 점 때문에 나를 높게 평가해주시고, 예뻐해 주신다. (웃음) 앞으로의 프로젝트가 어떤 형태든지 간에 본인이 관여하는 영화에는 나를 꼭 참여시키고자하는 의사도 밝혀주시고. 내게는 굉장히 좋은 인연이다.

정우성의 스타성이 그렇게 점점 더 국제적이고 커지고 있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다. 당신은 늘 스타로서의 자신에 대해 굉장히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걸 기탄없이 말하지 않나.
정우성: 스타로서의 자각은 나르시즘이나 ‘나 잘났어, 나 이 정도 레벨이야’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가고자하는 첫 번째 단계의 시작점이 된다.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데 본인이 입고자 하는 옷과 어울리는 옷은 다르다. 물론 입고 싶은 옷이 잘 어울리기까지 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나? 배우라는 이미지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역을 하고 싶은데 그 배우한테 어울리는 건 다른 걸 수 있다. 근데 배우가 자기 이미지를 찾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본단 말이지.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한테 맞는 옷은 남들이 어울린다고 하는 옷일 수도 있구나 깨닫기도 하고. 물론 그 과정이 헛되지는 않다. 여러 옷을 입어본 사람이 멋쟁이가 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장점, 포션 명확히 알았을 때 좀 더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 그런 시간들을 겪으면서 대중이 내게 원하는 모습, 내가 배우로서 대중들에게 자리하고 있는 위치, 이런 것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배우인 동시에 스타인 자리는 몇 명에게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연기파 배우들은 다양하고 개성 있는 연기로 어필할 수 있는 거고. 각자의 장점이 명확한 거다. 이게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고 해서 단점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장점이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대중과 소통이 원활해지는 거다.

“ 때 나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중이 정우성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해외에 나갈 때는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혀서 보내고 싶다고 할 정도 정우성에게 기대하는 건 연기 외적인 것도 크다.
정우성: 계속 그런 질문을 받는다. “할리우드에는 언제 진출하실 거예요?” 같은. 좀 더 큰 시장에서 나의 활동을 보면서 대리만족이나 통쾌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대중들의 바람 같은 게 느껴진다. 그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상상을 해준다는 건 굉장히 감사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목적지, 내가 가고자 하는 어떤 행로가 있기 때문에 그걸 단기간에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왕 할리우드에 가는 거 좀 더 크게, 오랫동안 내 영역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뭔가로 보여주고픈 마음은 없다.

그러고 보면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조급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다작을 하는 편도 아니고 특정한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스타일도 아니다.
정우성: 큰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천천히 가더라도 내게는 그 속도가 느리지 않다. 근데 그게 어떤 그림이라고는 쉽게 말 못할 거 같다. 하지만 해외에 나가서 영화를 한 편, 두 편 찍기 시작한다면 이전의 동양배우들과는 다르게 가고 싶다. 물론 성룡이나 이연걸처럼 특수한 무술이나 액션의 고수들이 아니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긴 하다. 그렇지만 영화 안에서 특정한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것에 그치기보다는 중요한 이미지나 주제로 등장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한다고 본다. 할리우드에 갔는데 영화 한두 편으로 끝날 순 없지 않나. 혹은 한두 편으로 끝나더라도 강렬한 걸로 남는 게 좋을 거고.

강렬한 것도 좋지만 남자배우로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화로 남겨보고 싶지는 않나. 의 도원처럼 정우성이 비주얼의 극단을 추구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기도 하다.
정우성: 그래서 요새 가 되게 좋다. 지금처럼 흥행되기 전에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아서 봤는데 혼자 박수를 막 치면서 좋아했다. 원빈이라는 남자배우가 너무 아름답잖아. 스토리랑 전혀 상관없이 원빈이 싸우고 달리는 모습만 봐도 좋으니까. (웃음)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같은 배우로서 한국영화에서 남자 배우가 저런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는 거, 되게 멋지지 않나. 물론 연출도 좋았고. 잠깐만 실수하면 다분히 고리타분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는데 잘 풀어나가면서 한 캐릭터로 끌고 간 명확함에다가 원빈까지 아름답다니! 브라보지 뭐. (웃음)

그렇다면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담긴 영화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정우성: 정서로서는 때였던 것 같다. 민이의 모습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는, 무엇을 잡아야 될지 모르는 외로움 같은 것들이 당시 청춘들에게 공유되었기 때문에 찬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나이대, 어른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닌 시간이 가지는 정서가 굉장히 소중했다. 그걸 민이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를 봤을 때 사람들이 ‘그 때 그 시간은 외롭지만 소중한 거였어’라고 느꼈으면 했다.

는 이후 십여 년 만에 하는 드라마인데 촬영 현장은 어떤가. 차승원, 정우성의 투샷을 기대하는 여성들이 많은데. (웃음)
정우성: 그러니까 말이다. (웃음) 어쨌든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다. 스태프들도 영화 스태프들이고 레드원 카메라로 찍고 렌즈도 계속 교체하면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니까 영화 현장이랑 크게 다른 건 없다. 다만 진행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방대한 분량을 찍다 보니까 불확신을 갖고 연기해야 할 때가 많다. 물론 액션 같은 건 행위니까 그 상황에서 하면 되는데 드라마를 연기할 때는 부담이다. 이 신 찍고 일본 갔다 와서 다음 신 찍고 이러니까. 나와 봐야 어떨지 알 거 같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되돌아 보는 게 중요하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정우성│“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는 배우로 늙고 싶다”
여전히 불교철학에 심취해 있나. 지난 번 인터뷰에서는 불교철학이 가장 큰 관심사였는데 최근에 관심이 가는 대상이나 화두가 궁금하다.
정우성: 너무 많다. (웃음) 이것저것 많지만 아직도 붙잡고 있는 건 삶이다. 요새 화두는 삶, 잘 산다는 것, 삶을 이뤄가는 것에 대한 거다. 그것에 대한 생각을 계속한다.

그런데 생활인으로서 일상 속에서도 생각의 끈을 늘 놓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우성: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우리는 계속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죽어서도 생각은 영혼 안에서 돌아갈 것 같다. 너무 신기하지 않니? 내가 아침을 시작할 때 그게 몇 시건 간에 나의 삶은 그 때 눈 뜨고 다시 저녁에 눈 감을 때 끝나고. 각자의 그런 삶이 수천억 개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러면서 우리가 만나고, 스치고, 어떤 면에서 공유되는 동시에 그 공유가 각자의 입장에 맞는 이해로 기억이 되는 것이.

그런 걸 매순간 신기하다고 느끼는 건 힘든 것 같다.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때가 더 많으니까.
정우성: 그러니까 깨어있으라고 하는 거다. 사람이 눈 뜨고 있고 말 한다고 깨어있는 게 아니니까. (웃음) 자기 마음을 자꾸 되돌아보는 게 중요하지 어떤 하나의 생각이 자리 잡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자리 잡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는 건 편협하고 편식하겠단 얘기거든. 물론 그 안에서 분별력이라는 건 있어야겠지. 물론 불교철학에선 분별하지 말라는 것을 늘 얘기한다. 분별한다는 건 단정 짓는 다는 거니까. 여기서 내가 얘기하는 건 그런 단정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이다. 근데 사실은 그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웃음)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되는 거 같다. 그래서 생각을 놓지 않는 건 어려우면서도 재밌다. 계속 이렇게 화두의 화두를 열고 쫓아가다보면 내 마음의 문이 열리니까.

에서 함께 연기한 양자경에 대해 “자신이 여자임을 잃지 않고 나이 들어가는 배우”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떤 배우로 나이 들고 싶나.
정우성: 남자라는 자아를 잃지 않고 늙는 거? (웃음) 근데 남자는 나이 들면 골치 아파 지는 것 같다. 난 남자야 이러면서 계속 젊은 여자한테 시선 보내고. (웃음) 여자가 여자로서 나이 먹는 거랑 남자가 남자로서 나이 먹는 건 좀 다른 거 같다. 물론 남자는 나이 들면서 주름이 멋스러움으로 표현이 되기도 하지만 특별히 어떤 준비를 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운동하고, 내가 좋아하는 철학이나 생각들을 더 튼튼하게 키워 가면 되지 않을까?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 곱게 늙는다는 건 외모를 잘 지킨다기보다는 나이만큼 주변을 아우를 수 있는 걸 말하는 거 같다. 나 또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 안에 있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사진제공. 이노기획

글.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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