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는 보기 좋게 깨졌다. 박민영은 외모가 아니라 사내아이처럼 당찬 매력으로 김윤희라는 인물을 그려낸다. “남자 같아 보일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런 것보다는 이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정도, 정말 동성친구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털털함을 보여주려 했죠. 윤희 캐릭터가 지닌 그 당차고 씩씩한 모습이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윤희란 인물은 끊임없이 남자임을 의심받는 예쁜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남장을 택하고 살아왔기에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캐릭터다. 여성성을 뒤로 숨긴 채 인물이 성장해 가는 과정의 성취감에 승부수를 걸어야 하는 윤희는 박민영에게도 분명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성장을 묻는 질문에 박민영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감독님과 작가님의 칭찬을 받을 때마다 부담스럽죠. 캐릭터가 워낙 좋으니까 캐릭터 덕을 보는 거 같아요. 윤희는 주체성도 있고 사랑스러운 면도 부각된 캐릭터니까요. 뭇 남성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하하.”
돌이켜 보면, 박민영이 대중에게 자기 이름을 알린 <거침없이 하이킥>의 유미도 매혹하되 종속되지 않고 연애의 주도권을 쥔 인물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의 법도를 넘어 새 세상을 꿈꾸는 윤희의 주체성이 화면에서 빛을 발하는 건 그 당당함을 잘 표현할 줄 아는 박민영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추천해 준 노래들 역시, 꾸밈없이 목소리 하나로 청자와 만나는 보컬리스트들의 음악들이다. “윤희가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 보시는 분들이 윤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으면 싶었다”는 박민영의 당당함과 어딘가 닮은 노래들이다.
“알리샤 키스는 데뷔곡 ‘Fallin`’부터 좋아했는데 ‘If I Ain`t Got You’는 가사도 좋고 워낙 대중적인 곡이잖아요.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서 아직까지 많이 들어요.” 스물 하나에 그래미 어워드 5개 부문을 휩쓴 무서운 신예에게 소포모어 징크스는 없었다. 알리샤 키스의 2집 < The Diary Of Alicia Keys(Special Edition) >에 수록된 ‘If I Ain`t Got You’는 발표된 지 7년이 지나도 여전히 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절제된 기교와 매끄럽게 올라가는 고음부는 이 곡을 새로운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하게 해줬다. ‘어떤 이들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원하고 / 어떤 이들은 그냥 모든 걸 원하죠. / 하지만 나에게 모든 것이란 의미가 없어요. / 당신이 없다면’이라는 절절한 가사도 벨벳의 질감을 지닌 목소리를 만나 듣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Like A Star’라는 곡은 정말 목소리가 정말 악기 전부를 차지하잖아요. 그만큼 느낌을 살리는 게 중요한 노래인데, 처음 딱 들었을 때부터 너무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어요.” 2006년 자기 이름을 건 데뷔음반으로 UK 차트를 휩쓴 코린 베일리 래는 무심하게 읊조리는 노래 안에 소울을 담아낸다. 듣는 이의 마음도 따라서 차분하게 쓰다듬어 주는 이 마성의 보컬은 소울의 본고장 미국까지 위협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1집 < Corinne Bailey Rae > 수록곡 ‘Like A Star’는 박민영의 말처럼 “일을 마친 새벽에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곡”이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반주 위에서 느릿느릿 그루브를 타는 이 곡은 폭발적인 성량 과시나 압도적인 하이 노트 한 번 없이 듣는 이의 마음을 휘저었다가 다시 달래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앨범 전체를 다 좋아하게 된 경우에요. 앨범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양한 노래가 있긴 한데, ‘Be Be Your Love’가 아마 모두 다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곡인 거 같아서 추천을 했어요.” 박민영이 추천해 준 레이첼 야마가타의 ‘Be Be Your Love’는 다니엘 헤니와 현빈이 김태희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드라마 타이즈 형식의 핸드폰 CF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레이첼 야마가타는 허스키한 보이스를 진성과 가성을 섞어 부르는 데 능하다. 피아노를 치는 레이첼 야마가타의 곡들은 다른 악기들보다 피아노가 전면에 나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Be Be Your Love’는 피아노에 묻히지 않고 곡을 이끌어 가는 담백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전 두 버전 다 좋아해요. 원곡도 좋아하고 정엽 씨가 부른 버전도 좋아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이 곡도 목소리가 전부잖아요. 영화도 그런 장르가 좋아요. 연기는 음악과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나 드라마도 연기가 잘 보이는 작품이 좋고, 노래도 보컬이 잘 들리는 곡이 좋아요.” 후렴부의 하이 노트가 인상적인 ‘Nothing Better’를 두고 유희열은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 돌고래들이 좋아한다’고 농을 건 적이 있었다. 그러나 ‘Nothing Better’는 단지 하이 노트 때문만이 아니라 곡 전체를 이끄는 보컬 파트의 탄탄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폭발적인 성량이나 소몰이 바이브를 과시하지 않고 깔끔하게 절제된 바이브만으로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노래다.
“초창기 애즈 원을 더 좋아하긴 하는데, 추천곡들이 전체적으로 조금 어두운 느낌이 있어서 밝은 노래를 하나 넣었어요.” 여성 R&B 듀오 애즈 원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민과 크리스탈의 목소리가 일궈내는 화음이 아름다운 팀이다. 박정현이나 머라이어 캐리를 연상케 하는 창법을 지닌 애즈원은 LA 한인교회 성가대원으로 만나 가수의 꿈을 꾸다가 데뷔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냥 이분들은 그 어울림이 너무 좋다”는 박민영의 말처럼 애즈원은 이음매조차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화음을 자랑한다. 오랜만에 디지털 싱글로 돌아온 애즈원의 ‘Sonnet’은 이들의 화음이 절절한 발라드만이 아니라 업비트의 댄스곡에도 근사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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