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배우와 캐릭터에 대한 은유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 연애 초짜들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들은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설정한 상황들에서 그들이 써준 멘트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어 내려간다. 애드리브 따윈 허용되지 않는다. 그 모든 계획에 따라 상대방의 마음이 넘어온다면 미션 성공.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연애 초짜들이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정해진 대사에 자신의 한 줌 진심을 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좋은 연기란 계산된 캐릭터 너머에서 배우의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에서 여주인공 희중 역을 맡은 배우 이민정과 대화하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예쁜 여배우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다 사실 이민정은 그동안 소화했던 캐릭터 안에서 어떤 유의미한 교집합을 이끌어낼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많은 배우는 아니다.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로 묶어 인식한 작품으로 한정한다면 더더욱. KBS 의 하재경 역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전, 그녀는 인지도가 없어 오디션마다 줄곧 떨어지고, 심지어 소속사가 부도나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위기의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게으른 사가(史家)의 심정으로 그녀의 경력을 나름 일관되게 서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영화 와 MBC , 같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지만 얼굴과 이름, 그리고 캐릭터로서 온전하게 자신을 인식시키지 못했던 선사 시대, 혹은 ‘흑역사’의 긴 터널을 거친 뒤, 의 대박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던 그녀는 SBS 를 통해 온전한 주연급으로 발돋움하고 드디어 로맨틱 코미디 의 여주인공이 되어 여배우로서의 경력에 한 방점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를 통해 이러이러한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걸 국민 반 정도는 알게 하고, 를 통해선 이민정이라는 배우가 작품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을 통해선 스크린에서의 존재감을 보여주라”는 소속사의 장기 플랜과도 얼추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현재 이민정이 방송과 CF 양쪽에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사후적으로 설명해줄 수는 있더라도 그것들이 가능할 수 있게 해준 작품 속 빛나는 어떤 순간들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의 하재경은 쿨한 성격의 재벌가 상속녀라는 설정만으로도 흥미로운 캐릭터지만 여기에 시원한 미소와 쾌활한 태도를 입혀 여자 시청자조차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 건 결국 이민정이라는 배우다. 하재경과 이민정이 닮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재경을 만나기 전, 아예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시기에 대해 입지전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런 기간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회사에 들어갈 때 ‘다른 회사 떨어져서 들어왔어요’라 말하지 않잖아요”라며 담백하게 정리하고,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연출이나 제작 공부를 해서 이 바운더리 안에 계속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집을 갔을까나?”라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 여배우의 매력이 정해진 대본 너머에서 살아있는 느낌을 부여한 건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가장 큰 분기점인 의 ‘멍구 커플’이 격정의 로맨스보다는 조금은 미흡하고 그래서 귀여운 선남선녀의 연애를 보여줬기에 더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방영을 앞두고 출연한 SBS 에서 그녀는 도도한 여배우라기보다는 강호동의 짓궂은 농담에 안절부절 못하는 평범한 20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쁘지만 그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담백한 태도는 현수(정경호)의 고백을 미처 다 듣지 않고 울며 뛰쳐나갔다가 그의 마음을 알고 감격하는 정인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드러난다. 이민정이 2년이 채 되지 않는 최근의 활동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작품 자체의 흥행이 아닌, 수많은 미녀 배우가 피고 지는 연예계에서 미녀, 혹은 20대 여배우에게 부여되는 스테레오타입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존재감을 작품 안과 밖에서 또렷이 드러냈다는 것일지 모른다.
계산된 시스템을 넘어서는 그녀만의 매력 물론 이러한 모습 역시 털털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카메라 바깥에서의 연기일수도 있다. MBC 에 나와 남자 출연자들이 실제로 본 자기 얼굴에 실망할까봐 걱정했다는 말이 계산된 겸손일 수도 있고, 인터뷰 종종 “재충전을 위해 책 몇 권을 들고 도망칠 것”이라 말하는 것 역시 의도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한다 말하긴 쉬워도 무슨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빤하지만 흡인력이 있는 기욤 뮈소”라는 식의 구체적인 답은 평소 담아온 생각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양보해 나 같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있어 보이려는’ 태도일 수 있지만 단순한 허영심만으로 같은 작품에서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리는 신비의 여인으로, 삶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지독하게 썩어 들어간 여피족의 생활을 담은 에서 파국의 꼭짓점을 이루는 여주인공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스타로 성장하는 장기 플랜의 중요한 방점이란 것과는 별개로 에서의 이민정이 눈에 띄는 건 그래서다. 희중은 그녀를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의 운명의 짝이라 생각하며 사랑을 느끼고, 과거의 연인이 자신의 공적인 업무를 포기하고서라도 되찾고 싶어 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하지만 동시에 남들이 먹지 않는 상한 복숭아를 일부러 골라 먹는 남자의 착한 심성에 마음을 열고, 과거에 겪은 이별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청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희중에 대해 “옛사랑의 추억이나 헤어짐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민정은 병훈(엄태웅)과의 재회에 흔들리고, 상용(최다니엘)의 어색하지만 진심이 담긴 태도에 흐뭇함을 담아내는 눈빛을 통해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요컨대, 이민정은 계획적인 스타 시스템의 도움으로 주목할 만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계산적인 시스템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유지하기에 흥미로운 배우다.
의 모티브가 되는 프랑스 희곡 에서는 주인공 시라노와 그가 대필해주는 연애편지로 사랑을 전하는 크리스티앙이 등장한다. 어쩌면 스타 시스템이 정해주는 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의 배우들은 크리스티앙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 상용이 그러하듯, 정해진 길 위에 자신만이 가진 빛을 덧입힐 때 비로소 상대방, 즉 관객 혹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작품의 흥행 여부와는 별개로 이민정이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가 더 굳어지는 건 그래서다. 웰메이드의 정점에 서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스타와 배우의 오묘한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이 여배우는 얼마 안 되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어느새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대필 연애편지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서.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예쁜 여배우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다 사실 이민정은 그동안 소화했던 캐릭터 안에서 어떤 유의미한 교집합을 이끌어낼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많은 배우는 아니다.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로 묶어 인식한 작품으로 한정한다면 더더욱. KBS 의 하재경 역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전, 그녀는 인지도가 없어 오디션마다 줄곧 떨어지고, 심지어 소속사가 부도나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위기의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게으른 사가(史家)의 심정으로 그녀의 경력을 나름 일관되게 서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영화 와 MBC , 같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지만 얼굴과 이름, 그리고 캐릭터로서 온전하게 자신을 인식시키지 못했던 선사 시대, 혹은 ‘흑역사’의 긴 터널을 거친 뒤, 의 대박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던 그녀는 SBS 를 통해 온전한 주연급으로 발돋움하고 드디어 로맨틱 코미디 의 여주인공이 되어 여배우로서의 경력에 한 방점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를 통해 이러이러한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걸 국민 반 정도는 알게 하고, 를 통해선 이민정이라는 배우가 작품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을 통해선 스크린에서의 존재감을 보여주라”는 소속사의 장기 플랜과도 얼추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현재 이민정이 방송과 CF 양쪽에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사후적으로 설명해줄 수는 있더라도 그것들이 가능할 수 있게 해준 작품 속 빛나는 어떤 순간들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의 하재경은 쿨한 성격의 재벌가 상속녀라는 설정만으로도 흥미로운 캐릭터지만 여기에 시원한 미소와 쾌활한 태도를 입혀 여자 시청자조차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 건 결국 이민정이라는 배우다. 하재경과 이민정이 닮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재경을 만나기 전, 아예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시기에 대해 입지전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런 기간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회사에 들어갈 때 ‘다른 회사 떨어져서 들어왔어요’라 말하지 않잖아요”라며 담백하게 정리하고,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연출이나 제작 공부를 해서 이 바운더리 안에 계속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집을 갔을까나?”라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 여배우의 매력이 정해진 대본 너머에서 살아있는 느낌을 부여한 건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가장 큰 분기점인 의 ‘멍구 커플’이 격정의 로맨스보다는 조금은 미흡하고 그래서 귀여운 선남선녀의 연애를 보여줬기에 더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방영을 앞두고 출연한 SBS 에서 그녀는 도도한 여배우라기보다는 강호동의 짓궂은 농담에 안절부절 못하는 평범한 20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쁘지만 그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담백한 태도는 현수(정경호)의 고백을 미처 다 듣지 않고 울며 뛰쳐나갔다가 그의 마음을 알고 감격하는 정인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드러난다. 이민정이 2년이 채 되지 않는 최근의 활동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작품 자체의 흥행이 아닌, 수많은 미녀 배우가 피고 지는 연예계에서 미녀, 혹은 20대 여배우에게 부여되는 스테레오타입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존재감을 작품 안과 밖에서 또렷이 드러냈다는 것일지 모른다.
계산된 시스템을 넘어서는 그녀만의 매력 물론 이러한 모습 역시 털털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카메라 바깥에서의 연기일수도 있다. MBC 에 나와 남자 출연자들이 실제로 본 자기 얼굴에 실망할까봐 걱정했다는 말이 계산된 겸손일 수도 있고, 인터뷰 종종 “재충전을 위해 책 몇 권을 들고 도망칠 것”이라 말하는 것 역시 의도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한다 말하긴 쉬워도 무슨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빤하지만 흡인력이 있는 기욤 뮈소”라는 식의 구체적인 답은 평소 담아온 생각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양보해 나 같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있어 보이려는’ 태도일 수 있지만 단순한 허영심만으로 같은 작품에서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리는 신비의 여인으로, 삶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지독하게 썩어 들어간 여피족의 생활을 담은 에서 파국의 꼭짓점을 이루는 여주인공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스타로 성장하는 장기 플랜의 중요한 방점이란 것과는 별개로 에서의 이민정이 눈에 띄는 건 그래서다. 희중은 그녀를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의 운명의 짝이라 생각하며 사랑을 느끼고, 과거의 연인이 자신의 공적인 업무를 포기하고서라도 되찾고 싶어 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하지만 동시에 남들이 먹지 않는 상한 복숭아를 일부러 골라 먹는 남자의 착한 심성에 마음을 열고, 과거에 겪은 이별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청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희중에 대해 “옛사랑의 추억이나 헤어짐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민정은 병훈(엄태웅)과의 재회에 흔들리고, 상용(최다니엘)의 어색하지만 진심이 담긴 태도에 흐뭇함을 담아내는 눈빛을 통해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요컨대, 이민정은 계획적인 스타 시스템의 도움으로 주목할 만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계산적인 시스템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유지하기에 흥미로운 배우다.
의 모티브가 되는 프랑스 희곡 에서는 주인공 시라노와 그가 대필해주는 연애편지로 사랑을 전하는 크리스티앙이 등장한다. 어쩌면 스타 시스템이 정해주는 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의 배우들은 크리스티앙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 상용이 그러하듯, 정해진 길 위에 자신만이 가진 빛을 덧입힐 때 비로소 상대방, 즉 관객 혹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작품의 흥행 여부와는 별개로 이민정이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가 더 굳어지는 건 그래서다. 웰메이드의 정점에 서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스타와 배우의 오묘한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이 여배우는 얼마 안 되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어느새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대필 연애편지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서.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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